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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사건 최초 발생지, 톈마다방(天馬茶房)

  • 2023.02.15
랜드마크 원정대
228사건 최초 발생지 톈마다방(天馬茶房) 앞에서 촬영한 타이베이제국대학(현재 국립타이완대학) 의대생의 단체 사진 - 사진: 228사건 기념재단

타이완 곳곳에 랜드마크를 찾아 현지인만 아는 이야기를 알려드리는 <랜드마크 원정대> 시간입니다. 이제부터 가이드북을 버리세요! <랜드마크 원정대>를 따라 타이완 여행을 즐깁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랜드마크 원정대>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이번주는 이어서 228사건의 최초 발생 지역 타이베이에 있는 관련 랜드마크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1947년에 일어난 228사건은 2차 세계 대전 후 불과 1년 반만에 발생했는데 폭발 원인 및 배경이 매우 복잡해 요인 하나만으로 결론을 내릴 수 없고 전체 사회 상황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중화민국 행정원이 발표한 ‘228사건 연구보고’에 따르면 사건 폭발 배경은 주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50년 간의 일치시기를 거친 타이완 백성들은 일본 정부의 정보 봉쇄로 중화민국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했고 반대로 국민당 정부도 타이완 상황에 대해 잘 파악하지 못해 결국 타이완인의 반정부 정서를 조장했습니다. 외성인과 본성인의 언어 차이, 군인들의 횡포, 외성인이 본성인 부녀를 대상으로 사기 결혼을 한 것 등을 원인으로 일본의 근대화 통치를 경험한 본성인들은 외성인이 저속하다고 생각하고 일본 시대와 비교하면서 점차 외성인, 본성인의 모순을 심화시켰습니다. 타이완인이 갖고 있던 큰 기대가 결국 정부의 폭압적인 통치로 실망, 심지어 경시가 되었습니다.

다음에 정치적 측면에서 공무원의 부정부패는 물론 외성인 위주로 구성된 정부가 본성인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로 당시 최고위직은 모두 외성인이 차지했고 본성인이 외성인의 절반에 불과한 월급만 받았습니다. 여러 식민 정권을 거쳐 자치를 희망한 타이완인은 ‘개가 떠나니 돼지가 왔다(狗去豬來)'는 말을 통해 새 정부에 대한 실망을 표현했습니다. 시끄럽지만 여전히 유용한 개는 일본을 상징하고 살만 피둥피둥 찌고 무식한 돼지는 국민당 정부를 상징했을 정도로 타이완인의 불만은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또한 당시 타이완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 천이(陳儀)는 성격이 고집스럽고 부하를 방임해 비판을 많이 불러왔는데요. 영화 <비정성시>에 등장한 지식인도 ‘천이같은 토비도 조국에 중용되었으니 이제 정부에 대해 그리 바랄 것도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경제 측면에서 정부는 일본 정부의 전매(專賣) 제도를 확대 실시하고 타이완 전역의 물자 유통을 통제하는 무역국을 설립해 거의 모든 민생 관련 산업 및 공업을 독점했습니다. 이처럼 지나친 산업 국유화는 일반 사기업의 앞길을 막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잘못된 정책으로 타이완 경제 상황이 더욱 악화되면서 악성 인플레이션이 폭발해 쌀, 설탕와 생활용품의 가격도 급등했습니다. 1945년부터 1946년까지 물가가 100배나 폭등하고 식량 문제가 매우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업 문제로 치안이 불안해졌습니다. 1946년 연말 통계에 따르면 당시 타이완 600만 인구 중 실업자 수는 40만-50만으로 추정되고 실업률은 6.7%-8.3%로 추정되었습니다. 

앞에 설명드린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배경 때문에 타이완에서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고 있었으나 정부는 여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1947년 2월 27일, 전매국은 타이베이 다다오청(大稻埕)에 소재하는 톈마다방(천마다방, 天馬茶房)에서 밀수 담배가 있다는 밀보를 받았고 단속용원과 경찰은 바로  출동했습니다. 톈마다방 앞에 노점에서 담배를 팔던 린쟝마이(林江邁)라는 부인이 허가를 받지 않아 단속되고 총신으로 머리를 가격당하는 등 심한 구타를 당하자,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항의하기 시작했고 단속요원 및 경찰과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그 후 외성인 경찰이 본성인 시민을 폭행했다는 소문은 점차 타이완 전역에 퍼지면서 반정부 시위 규모도 점점 커졌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리는 랜드마크는 바로 228사건이 터진 첫 번째 장소인 톈마다방(天馬茶房)입니다.

톈마다방은 타이완 일치시기 유명한 영화 변사 잔티앤마(詹天馬)가 1941년에 설립한 카페였습니다. 영화 변사라는 직업은 무성 영화를 상영할 때 영화에 맞추어 그 내용을 설명하고 더빙하던 사람입니다. 당시 관중들이 영화표를 끊기 전에 우선 변사를 확인했을 만큼 변사는 영화 관람할 때 아주 중요한 역할이었는데 타이완 최고 변사라 불리던 잔티앤마는 변사 외에도 1931년에 개봉한 영화  도화읍혈기(桃花泣血記)의 동명 노래를 작사해 타이완어 유행가요의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연극단에 가입한 잔티앤마도 타이완 연극에 대해 많이 기여했는데요. 당시 일본 정부가 타이완어 연극을 금지해 연극단이 레퍼토리를 몰래 바꾸는 방식으로 빈틈을 찾아 스스로가 원하는 연극과 노래를 발표했습니다. 톈마다방은 당시 연극단 인사를 비롯한 문인과 학자들의 중요한 모임장소로 항상 인파가 붐볐습니다. 


1999년에 개방한 영화 <톈마다방> - 사진: Catchplay

1999년에 개방한 영화 <톈마다방>은 바로 1945년 전후 톈마다방의 성황을 다루는 영화입니다. 톈마다방은 당시 테이베이의 대표적인 문화 모임 및 핫한 소개팅 장소였는데 영화에서도 다방 안에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훈남훈녀들이 부모 옆에 서로 마주보고 수줍게 웃는 장면이 많이 등장합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면서 조국, 즉 중화민국에 대해 의논하거나 시국을 비판하는 등 사회를 관심하는 사람 모두 다방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조국의 도래를 오래 기다렸던 타이완인들이 ‘광복’을 맞이해도 여전히 자신의 언어를 쓰지 못했습니다. 국어운동을 실시한 국민당 정부는 중국어만 사용할 수 있다는 정책을 발표해 타이완인들이 모국어를 몰래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영화 중 아주 인상 깊은 장면이 있습니다. 다방 직원이 다방 입구의 바닥에 미국과 영국 등 2차 세계 대전 때 일본의 적대국의 깃발을 그렸고 사람들은 다방에 들어가면 이 깃발들을 밟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일본 항복의 소식을 듣고 다방은 가급적 빠르게 미국과 영국의 깃발을 지우고 간판에 중화민국의  청천백일만지홍기(靑天白日滿地紅旗)를 그렸습니다. 이 장면도 남자 주인공의 대사와 호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남자 중인공은 ‘미래가 계속 온다. 나는 미래에 대해 생각조차 못한다’고 말했고 마침 ‘오랫동안 식민지로 지배당한 타이완은 언제 스스로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 겁니다.

담배단속 사건으로 톈마다방은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해당 건물은 2005년에 철거되어 새 건물로 지어졌는데요. 현재는 문화계 인사의 스튜디오가 되고 3층에 톈마다방을 새로 개업하며 228사건에 관한 사료 및 사진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톈마다방은 더 이상 타이베이의 대표적인 문학 및 예술 모임장소가 아니어도 그의 정신은 여전히 타이완 곳곳에 존재합니다. 독립 서점, 문예 카폐, 음반 판매점 등 문예장소에서 시국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등 실제 행동으로 사회에 적극 참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 잔티앤마가 큰 위로를 받을 수 있겠죠.


228사건에 관한 사료 및 사진을 전시하고 있는 현 톈마다방 - 사진: 위키백과

타이베이 다다오청에 있는 톈마다방은 디화제(적화가 迪化街), 융러시장(永樂市場), 닝샤야시장(寧夏夜市) 등 핫플레이스와 가까워 있어, 청취자 여러분께서 타이완 여행하실 때 톈마다방에 가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엔딩곡으로 영화 <천마다방>에서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 함께 한 노래 <행복행진곡(幸福進行曲)>을 띄워드리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타이완이 노래 제목처럼 행복을 행해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오늘 <랜드마크 원정대>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
1. 天馬茶房,二二八事件基金會。
2. 行政院《「二二八事件」研究報告》 ,二二八事件基金會。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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