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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ti 중앙방송국Rti 중앙방송국국립고궁박물원 - 2021-02-26

  • 2021.02.26
국립고궁박물원
북송시대 화가 범관(范寬)이 서기 약 1000년도에 그린 계산행여도(谿山行旅圖). -사진: 국립고궁박물원 제공

2021-02-26

건륭제의 2등품, 고궁의 1등 국보 계산행여도

청나라 말엽 당시 관원들이 무엇을 중요시 여기며 소장을 했을까? 지난주에 '모공정'을 소개할 때에도 말씀드렸던 소장가 진개기(陳介祺)의 말을 인용한다면: '古之好古,唯在致知,今之好古,唯在玩物。今日而好古,唯多收三代吉金文字與三代吉金,是古人文字之真,足與古經并重。藏書則次之,藏漢以後碑版、晉以後書畫又次之,而皆易近玩物矣。

진개기의 관점에서 볼 때 소장품에도 우선 순위가 있는데 이중 최고 유물은 중국 삼대시대(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 기원전 약 2070년-기원전 256년) 길금(吉金:고대의 청동기)과 탁본(탁인법-拓印法- 금속·기와·돌·나무 등에 새겨진 그림이나 문자를 베껴내는 방법 ), 차순위로는 장서(藏書), 그 다음으로는 한나라(漢기원전 3세기~기원 3세기) 이후의 문자를 새긴 비석(碑版)과  진나라(晉:265∼316) 이후의 서화를 소장하는 건 청나라 말기 관원들의 고상한 취미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최고라고 여기는 그림과 글, 서화 작품은 청나라 말기 소장가들 눈에는 그저 취미로 가지고 노는 노리개와 다름없는 물건일 수도 있었다. 나중에 사진, 인쇄 등 기술이 보편화된 후 옛날에는 소수의 귀족들이나 감상할 수 있는 고대 서화 예술은 인쇄물로 전파되면서 사회대중들도 감상이 가능하게 됐고 널리 보급될 수 있었다. 

청동기, 청대 말기 국수주의 운동으로 민족 자존심으로 인식돼

근대사에서도 접하셨겠지만 청나라 말기 서양 열강들이 중국을 나눠가지려 각종 침략 행위를 단행하게 되자 중국에서는 국수주의(國粹)운동이 일어 자국 전통이 뛰어나 외국을 배척하는 운동이 펼쳐졌고 이때의 고대 그림과 글은 더 이상 취미로 가지고 노는 물건이 아니라 민족의 자부심으로 여기면서 민족적 정감과 문화적 공동체 의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고대 유물들, 그림과 글은 민족적 정신을 떨쳐 일이킬 수 있는 매우 쓸모있는 수단이 되었다.  1912년1월1일 중화민국 건국 초기인 1910년대에 중국 송나라와 원나라 시대 회화 작품이 많지 않았다. 비단이나 화선지에 그린 회화작품은 보관상 쉽지 않아서 공화국 초기의 송나라와 원나라 시대 회화 작품의 연구는 유한했다.

공화국 건국 후 14년 뒤인 1925년 쌍십절에 베이징 자금성 일각에 고궁박물원을 개원하였다. 국민정부가 1928년에 반포한 '고궁박물원 조직법'을 참고해볼 경우 박물원에는 겨우 고물(즉 고대 유물, 골동품), 도서(고대 서적), 문헌(고대 문헌) 등 3개 전시관을 설치했을 뿐 서예와 회화 작품을 전문적으로 전시하는 '서화' 전시관은 따로 없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 일본이 중국 곳곳에서 전쟁을 일으킬 당시 고궁 유물들이 일본인 손에 넘어가는 걸 모면하기 위해 일부 유물들을 서남쪽 후방으로 옮기는 것 외에도 당시 중화민국에 우호적인 구미 민주주의 국가로 해외 순회전시의 명목으로 유물들을 잠시 전란에서 피하도록 했다. 당시의 예를 들어 영국에서 고궁 유물 전시회를 가졌었다. 이 외에 교육부에서는 '제2회 전국 미술 전람회'를 개최했고, 더욱이 당시 여러 출판물이 발행되어 서예와 회화 작품은 더욱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게 되었고, 예술계를 비롯해 소장가와 감상자들 사이에서 특정 화가나 작품에 대한 중시도 또한 두드러지게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북송시대 큰 폭의 3대 산수화 그림도 바로 이때 주목을 끈 작품들이었다. 

1948년과 1949년, 3차례에 걸처 지금 타이베이에 소장된 고궁 유물들이 타이완으로 건너와 모두 3곳의 수장고에 소장해뒀다가 1965년11월12일 타이베이에 박물관을 지어 국립고궁박물원을 재개원하게 되었다.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의 초기 소장품은 원래의 자금성 고궁박물원 소장품과 중앙박물원에서 소장품을 통합해 중산박물원이라는 이름으로 제막식을 거행한 것인데 나중에 '국립고궁박물원 관리위원회 임시조직규정'에 의거해 당시 고물(골동품)과 서화 2개 부문을 설립하고, 고적과 문헌 등은 서화 부문이 통합 관리하도록 해 이때부터 서화의 중요성이 대폭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주에는 근현대 속 중국이 외래 침략으로 인해 전쟁이 잦았던 시대에 서주시대(기원전 1100-기원전 771년) 청동기 '모공정(毛公鼎)'의 파란만장한 영화 인생과 같은 과정과 의미에 대해서 소개했다.

오늘은 전문가의 관점에서 본 최고의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보물이며 중화민국의 국보인 '계산행여도'의 고궁박물원 소장 배경을 소개한다.

건륭제의 2등품-계산행여도, 타이완에서 국보로 등극

<계산행여도>가 고궁을 대표하는 최고의 보물로 등극하게 된 것은 타이완으로 옮겨진 후의 일이다. 더욱 중요한 건 아무래도 산수화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 날로 발전한 데에도 기인했다고 본다.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에서 일할 때 가끔 우스갯소리로 청나라 건륭황제는 초대 박물원 원장(박물관 관장)이다라는 말을 한다. 어떨 때에는 북송시대 휘종황제가 초대 박물관 관장이라는 농담도 하곤하는데, 그건 약900년 전의 송나라 휘종황제나 약300년 전의 청나라 건륭황제 모두 황제 자신이 글과 그림에 능하고 감상하는 안목도 높으며 고대 예술품 수집을 즐겼던 프로급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건륭황제 시대 때 궁정에 소장한 회화작품을 '석거보급 초편(石渠寶笈 初篇)'에 수록했는데, 그 당시 족자 한켠에 있는 관식(款識)에 의거해 북송시대 범관의 작품이라고 기록했다.

300년 전, 석거보급 초편에 수록된 '계산행여도'는 2등품으로 분류되었는데, 비록 황제의 눈에 든 그림이지만 가장 좋아한 작품 스타일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박물원의 주요 소장품이 타이완으로 옮겨진 후 타이중 우펑(霧峰) 베이거우(北溝)에 잠시 보관을 할 때부터 이미 수많은 전문가들, 미술사학자들의 중시를 받았다고 한다.

1972년 봄(3/19) 리린찬(李霖燦) 선생님이 당시 연합보에 에세이 <귀대기-歸隊記>를 발표할 때, 베이거우 시기에 (즉 타이완으로 옮겨진 후부터 1965년 이전 사이) 기회만 되면 꼭 “계산행여도”, “조춘도”, “만학송풍도”의 3대 작품을 감상했었다고 밝힌 바 있다.  

“계산행여도”가 북송시대 거장 범관의 작품이 분명하다는 걸 방증해준 건 바로 이 그림에서 천 년 동안 묻혀있었던 범관이 쓴 이름을 발견한 것인데, 이도 바로 리린찬 선생님이 1958년 베이거우 수장고에서 감상하다가 그림의 우측 하단 길을 가는 여행객 후방의 나뭇잎 사이에서 ‘범관’이라는 두 글자를 발견한 것이다. 이로서 ‘계산행여도’는 범관의 작품이라는 게 증명되어서 더욱이 유명해졌고, 국립고궁박물원 내의 북송시대 산수화의 1등의 자리에 앉게 됐다. 이 그림은 높고, 먼 회화의 구도, 북송시대 산수화의 대표작으로 미술사에 영원토록 기록될 것이다.-jennifer pai

원고.보도: 백조미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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