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고궁박물원 - 2021-02-19

  • 2021.02.19
서주(西周) 선왕(宣王, 기원전 9세기~8세기) 시대 모공정(毛公鼎). 솥 안에 500글자가 새겨져 있다. -사진: jennifer pai

국립고궁박물원 - 2021-02-19

모공정毛公鼎, 계산행여도谿山行旅圖, 취옥백채翠玉白菜 등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에 관심을 갖는 분이시라면 충분히 들어보셨을 만한 유물들이다. 2월19일 금요일 오늘 고궁박물원 제대로 알기 시간 중반부터는 이에 얽힌 이야기를 전하겠다.

우선은 오늘 주제와 관련한 역사, 미술 및 고궁박물원의 배경을 요약해 소개한다.

타이베이 고궁 소장품 근70만점

2021년 1월 31일 현재 국립고궁박물원에는 총 69만8796점(서적/권 포함)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으며, 종류별로 본다면 청동기 (6,241점), 도자기 (2만5,592점), 옥기 (1만3,478점) 등 전시실에서 상시로 보여주는 유물들이 있는데 이들은 수량도 적지 않으며 중국 역사와 중화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들이라 늘 보이는 것이지만 매우 중요한 유물들이다.

그리고 평균 3개월을 주기로 교체해 전시하게 되는 서예(법첩495점과 탁본 900점 포함, 총 5134점), 회화(그림 6,744점), 자수와 직조 및 편직물(1,881점), 부채(1,882점) 등은 특별 테마 전시가 있을 때에는 꼭 방문하여 관람하실 것을 추천하며, 기타 기물 종류로 칠기(773점), 법랑(2,520점), 조각(666점), 문구(2,379점), 전폐(錢幣, 또는 古錢고전, 옛날 돈 6,953점) 및 각종 재료와 기타(1만2,495점) 아이템, 예컨대 장신구 등은 대부분 특별한 주제를 가지고 짧게는 3개월 이내, 보통은 1~2년, 길게는 4~5년 동안 전시를 하는데, 개인적으로 흥미를 갖는 주제나 유물 종류를 골라서 깊이있는 관람을 하실 것을 추천한다.

그 외에 수량 면에서는 가장 많지만 전시 기간은 최고 3개월에 불과한 고적.문건.서류 등이 있는데 이중에는 극히 중요한 서적들과 옛 여지도 그리고 황제의 조서, 대신들의 상소문 등 역사 연구에서 극히 중요한 문서들이 있다. 서적과 문서의 전시는 그냥 지나치는 관람객들이 대부분인데 자세히 그 내용을 들여다 본다면 역사를 알 수 있고 작성 당시의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어서 꼭 추천하고 싶은 전시품이다.

夏禹鑄九鼎象九州-청동기의 의미

하夏나라는 선사시대이자 청동기 시대에 속하지만 교과서 교재에서는 상商나라를 모든 국가의 기본을 갖춘 왕조의 시초로 기술하고 있다.

하나라 우(禹)임금이 물난리에 대책을 잘 세웠던 군주로 유명한데, 그가 하나라를 건립하고 9개의 정(鼎)을 만들어 9개의 주(州)를 상징했다고 한다. 천자(天子)만이 정(鼎)을 9개 소유할 수 있는 건 중국 첫 번째 왕조인 하나라 때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고 진시황제秦始皇帝가 중국 역사상 첫 번째 황제가 되기 전까지 나라의 정권을 물려주는 상징적인 보물은 옥새玉璽가 아니라 바로 9정-9개의 청동으로 만든 솥-九鼎이었다.

청동기 시대에는 당연히 청동기가 가장 중요한 기물이었다. 하지만 아무나 사용하는 도구는 아니었다. 왕족, 귀족 등 고귀한 신분을 지닌 사람 만이 청동기를 소유했었는데, 그건 은상(殷商 기원전 17세기~기원전 12세기) 시대 때부터 주나라(周 기원전 12세기~기원전 3세기)까지 앞뒤로 1천5백년 동안 청동기는 권력의 상징, 신분의 상징이었으며, 그 시대에 가장 중요시 여겼던 제사 때 사용하는 최고의 제기였다. 군사 무기로도 청동기를 이용했었지만 그 당시 청동 무기가 그리 보편적이지는 않았다.

문화역사에서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서주시대(西周 기원전 약 1100-771년)의 모공정(제작 시기: 기원전 828~기원전 782년 사이)은 우리 교과서에 나오는 고대 유물이라서 전국민에게 잘 알려진 유물이며 그래서 인기 전시품으로도 꼽히고 있다. 모공정은 또한 중화민국 ‘국보’이다.

국지중보(國之重寶)-나라의 가장 중요한 보물- 청동기, 청동 재료로 만든 솥鼎, 이 솥은 밥을 해 먹기 위해 만든 게 아니고 통치자의 상징, 권위의 상징 또는 제기로 사용되었었다.

청동 국보 모공정에 얽힌 이야기

모공정은 현재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6,241점의 청동기 가운데 가장 크거나 가장 정교하거나 무늬가 제일 예쁘거나 임금의 것도 아니지만 지금 고궁에서는 가장 중요시 되는 청동기이다. 그 이유를 간단하게 말한다면 바로 모공정 안쪽에 총 500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며, 지금까지 발견된 청동기 시대의 청동기 중 글자 수가 가장 많기 때문에 1등 청동기로 각광 받게 된 것이다.

모공정은 청나라 도광(道光-재위 1821-1850년)황제 시대에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치산(歧山)에서 발굴된 후 급속도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는데 금석(金石-청동기와 비석 등을 뜻하며, 거기에 새긴 글을 금석 문자라고 함) 대가 진개기(陳介祺)와 단방(端方)이 차례로 소장했다.

진개기는 이 정鼎을 손에 넣고 너무나도 아껴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았고, 극소수의 명문(銘文-즉 청동기에 새겨진 글) 탁본만이 금석 소장가들 사이에서 전해졌을 뿐이었다.

단방은 신해辛亥혁명(1911년 10월) 봉기 때 희생됐다. 중화민국이 건국된 후 그의 후손들은 모공정을 러시아가 당시 중국에 개설한 금융기구  華俄道勝銀行(1895년12월에 세인트 피터스버그에 본점을 두었고, 러시아,청나라,프랑스 등 3국의 자본으로 운영됨) 티엔진(天津)지점에 담보로 잡혀놨는데 당시 심슨이라는 미국인이 모공정을 얻으려 했으나 고대 유물을 중요시하는 중국인들의 저지로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걸 모면할 수 있었다. 후에 덕망 높은 서예가이자 중화민국 건국 초기인 1912년5월에서 1913년 9월 사이에는 육.해군 대원수 대본영 재정부장, 철도총국장, 교통부 차관 등을 역임했던 엽공작(葉恭綽 1881-1968년)이 구입해 소장했다.

문화를 사랑하는 애국자 덕에 모공정 해외 반출 막아

일본의 침략으로 중일전쟁이 폭발하면서 모공정은 스펙터클하며 스릴 만점의 피란길에 오르게 된다. 엽공작의 조카 엽공초(예궁챠오-葉公超 , 1904-1981, 중화민국 외교장관, 주미 대사 등을 역임한 학자)가 유물을 가지고 피란을 가는 도중 여러 차례 포화와 일본 헌병대의 수색 등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겨 ‘모공정’을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었다.

엽공초는 그 후 가정 경제가 매우 곤란하여 ‘모공정’을 은행에 넘겼는데 샹하이上海 거상 진영인(陳詠仁)이 은행에서 이를 사들여 1946년 국가 원수 장개석(장제스)에게 60세 생일선물로 기증을 했다.

‘모공정’을 선물 받은 장제스는 이를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해 국가의 소유물이 되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옛날 권위통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통치자에게 귀중한 선물을 하는데, 장제스는 총통 임기 내에 받았던 모든 고대 유물들을 받는 즉시 국가에 기증했으며, 현재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의 몇 점의 국보 중에도 장제스가 선물 받아 박물관에 기증한 게 있다.

기증한 사람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모공정’은 1843년에 산시성 치산에서 발굴된 후 단방(端方)이 입수한 1900년대 초부터 약 30년 동안 각종 연유로 소장가가 바뀌는 운명이었는데 그때 특히 미국과 일본의 소장가들이 극히 손에 넣고 싶어했던 유물이기도 하며 외국인이 가져갈 만할 때면 당시 학자나 거상 등이 나서서 이를 국내에 보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모공정’은 훗날 국가와 민족의 상징적인 존재로 위상이 높아졌으며, 국가의 흥망과 나라와 민족의 운명과 함께하는 운명공동체와 같은 대표적인 유물로 사랑을 받게 되었다.

전해내려온 유물을 민족의 자부심으로 여기며 보전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썼던 시기 중 1930년대와 40년대 사이 일본이 침략했을 때 당시를 꼽을 수 있는데, 그때 베이징 자금성 고궁의 유물들은 물론 선양(瀋陽)의 고궁, 러허(熱河) 피서산장 등 황실 문물 중 최고의 역사적 유물들을 상자에 잘 담아서 중국의 남쪽으로 서쪽으로 남서쪽 후방으로 어렵게 옮겼던 역사는 지금도 세인들에게 회자되는 잊지 못할 과거이다. -jennifer pai

원고.진행: 백조미

프로그램 진행자

관련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