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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ti 중앙방송국Rti 중앙방송국국립고궁박물원 - 2021-02-12

  • 2021.02.12
국립고궁박물원
국립고궁박물원 제대로 알기 시리즈 3, 유튜브 화면 캡쳐

2021-02-12

고궁의 여러 보물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몇 점의 유물에 대한 배경 요약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을 얘기할 때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폭발한 중일전쟁, 대일항전이 승리로 마무리 된 후 쇠약해진 집권 중국국민당에 맞서 어부지리의 득을 보려는 중국공산당이 정권 다툼을 벌인 국공 내전, 그리고 양 당의 수뇌였던 장제스 총통과 마우저둥 주석 등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과 인물들을 다시 호출하게 된다.

1912년 중화민국이 건국된 후에 처음에는 청나라 마지막 황제 아이신제로 푸이가 여전히 베이징 자금성 일각에서 거주하고 있었고, 그 당시 이미 수많은 유물들이 해외로 빠져나갔었다. 그러다가 1925년 국경일인 10월 10일 당시 자금성(紫禁城)에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을 개원하게 되었는데, 얼마 안 있어 일본의 침략을 받게 되면서 옛 황실의 유물들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피란길에 오르게 됐다.

고궁에는 69만7천여 점의 소장품이 있으며, 이중에 무엇이 진원삼보(鎮院三寶)-국립고궁박물원의 최고의 3대 보물, 3대 국보-냐는 것에 대해서 전문가와 사회대중의 시선은 좀 다르다.

보통 언론이나 일반인들은 취옥백채翠玉白菜, 육형석肉形石, 모공정毛公鼎이 3대 국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모공정이라는 솥에다 취옥백채라는 배추와 육형석이라는 삼겹살을 볶아서 먹으면 맛있겠다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곤 한다.  대부분의 외국인들도 취옥백채와 육형석을 최고의 보물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중국 미술사를 배운 사람들은 보통 북송시대 범관(范寬)의 ‘계산행여도谿山行旅圖’, 곽희(郭熙)의 ‘조춘도早春圖’, 이당(李唐)의 ‘만학송풍도萬壑松風圖’라고 고집한다. 

십수 년 전 타이완의 유력 언론사가 전문가 버전과 일반 관중 버전의 국립고궁박물원 10대 국보에 대한 인식을 이해하기 위해 조사를 실시했었다. 그 결과, 전문가와 사회대중이 선택한 10대 국보 중 단 한 점만 같고 기타 9점은 전부 달랐다. 동일한 단 1점은 서기 303년에 태어난 동진(東晉)시대 왕희지(王羲之303-361)의 작품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서예 작품이다.

참고로 연합보 계열사의 연합보(조간신문), 연합만보(석간신문), 경제일보, 유페이퍼(무료 간행물)에서 고궁 소장품 6점을 상대로 기사에 출현한 횟수를 정리한 결과 1960~1980년대에는 모공정이, 1990년대에는 계산행여도가, 2000~2010년대에는 취옥백채가 각각 가장 많이 언론에 등장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 조사 대상 유물 6점:

명칭

작가

종류

시대

谿山行旅圖

계산행여도

범관范寬

회화

북송

서기960-1127년

早春圖

조춘도

곽희郭熙

회화

북송

서기960-1127년

萬壑松風圖

만학송풍도

이당李唐

회화

북송

서기960-1127년

毛公鼎

모공정

공예장인

청동기

서주

기원전 약 1100-771년

翠玉白菜

취옥백채

공예장인

옥기

서기1644-1911년

肉形石

육형석

공예장인

석영(벽옥)

서기1644-1911년


예컨대 1960년대부터 70년대와 80년대의 30년 동안 청동기-모공정毛公鼎이 출현한 횟수가 이상 6점 중 가장 많다. 그건 우리의 교과서에 모공정의 사진이 있기 때문이라 사료된다. 그 외에 역사가 말해줄 수 있다고 본다. 옛날 정권을 잡은 황실은 정통을 따지게 되는데 3700년 전의 청동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청동기는 ‘국지중보(國之重寶)’ 나라의 가장 중요한 보물이라고 여겨져 왔고, 왕위에 오른 후 큰 청동기 솥, 즉 청동 정(鼎)으로 왕의 위엄과 실권을 나타냈었다. 이 부분은 중국 역사에서 청동기 정(鼎)을 기반으로 하여 정권을 대표하는 상징적 보물로 극히 자주 출현했기에 모공정이 반세기 전의 언론에서 자주 거론되었다는 건 오히려 당연하다고 여겨진다.비록 한 언론사의 예이지만 해당 조사를 참고할 경우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외국인들이 모르는 배경을 이 같은 언론 기사에서의 출현 횟수로 설명을 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계산행여도谿山行旅圖의 출현 횟수가 가장 많은데 그건 80년대 이후 해외 박물관과 기획전시 차 외국으로 반출하려고 했던 목록 중에 계산행여도 등 천년 전 그림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때 학술계, 특히 미술사 방면의 전문가와 문화유산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국보 반출 결사 반대’ 등 구호가 담긴 플랭카드를 가지고 고궁박물원 앞에서 연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농성을 벌였었기 때문이라서 그렇다고 본다. 당시 미술사를 공부했던 사람이라면 그러한 해외 출장 전시를 다들 반대했다고 본다. 항의 시위로 인해서 사회대중들이 1천년 전의 그림에 대해서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또 이어서 2000년대와 2010년대를 보면 취옥백채가 압도적으로 많이 출현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양안간의 민간 교류가 매우 활발했고, 상호 관계가 좋았으며, 중국인의 타이완 관광을 개방하면서 고궁박물원의 취옥백채는 중국인들의 최애 유물로 일약 슈퍼스타가 됐다. 사실 근 20년 동안 취옥백채가 유명해진 원인 중의 하나는 바로 한국어 가이드를 포함한 여행사 가이드들의 소개가 큰 영향을 발휘했다고 믿는다. 미술사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취옥백채는 누가 봐도 배추로 보이고, 게다가 비취로 만들어졌으니 그게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어서 사랑받는 인기 유물 1등 자리를 수십 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본다.

1925년 10월 당시 베이핑(北平)이라 불렸던 베이징 자금성의 고궁박물원이 개원했는데, 그 후로는 중일전쟁, 국공내전, 또 타이완으로 넘어와 1965년 11월 12일에 타이베이에서 재개원을 하기까지 파란만장한 시대극과 같은 운명을 지나왔다.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의 유물 중에서 ‘국보’로 선정될 수 있는 작품으로는 반드시 역사성, 중요성, 희소성, 예술성과 인기도까지도 겸해야 가능하다. 타이완에서 이들 유물에 대해 ‘국보’라는 대단해 보이는 수식어가 정착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2008년도부터 ‘국보’를 지정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고궁의 여러 보물 가운데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몇 점의 유물을 골라, 그에 대한 배경을 요약해 드렸는데, 다음주에는 모공정, 계산행여도, 취옥백채 등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다 알 만한 유물에 얽힌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jennifer pai

원고 작성. 진행: 백조미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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