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서점이 없는 ‘서점거리’ 충칭난루(重慶南路)
한때 타이베이에서 서점과 출판사가 가장 밀집했다던 충칭난루(重慶南路). 지하철 시먼(西門)역 4번 출구에서 멀지 않은 중산당(中山堂)과 그 광장을 지나 타이베이 기차역으로 향하는 길 위치한 충칭난루에 가면 음식점이나 상업가들이 있는 여느 타이베이의 길과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한때 잘나가는 서점거리였던 충칭난루는 최근 몇 년 동안 출판업 불황으로 서점과 출판사들이 여럿 철수했고, 가장 수익성이 좋았던 진스탕(金石堂) 서점조차도 2018년에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면서 공식적으로 '서점거리'라는 간판을 내린 충칭난루는 식당, 상인과 여행, 금융업 등이 들어서며 특색없는 타이베이의 또 다른 평범한 거리가 되었습니다.
디지털 시대, 종이책을 직접 사읽는 인구가 계속해서 감소하면서 한국 최대 서점인 교보문고도 2022년 적자로 전환했고, 2023년에는 창사이래 첫 희망퇴직을 받기도 했다는군요. 타이완도 예외는 아닙니다. 타이완 사람들이 거의 책을 읽지 않는 가혹한 현실에서, 타이완의 대표 유명 서점 청핀(成品) 서점도 그렇고, 대형 서점과는 결을 달리하는 독립 서점도 모두 복합적인 문화 콘텐츠 경영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커피와 식사를 겸해서 책을 판매하기도 하고, 독립 서점의 경우 장소를 대여하는 임대업도 진행하죠. 타이베이의 많은 서점들은 "타이완 사람들이 거의 책을 읽지 않는다"는 압박 아래, 현실에 머리를 숙일 수 밖에 없습니다. 더이상 책 순매도로 승부할 수 있는 전문서점은 없어보입니다.
산민서국(三民書局)
명색이 이름만 ‘서점거리’로 남은 충칭난루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서점이 있습니다. 바로 산민서국(三民書局)입니다. 삼민서점은 거의 무너져 가는 타이베이의 독서 생태계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서점 중 하나입니다. 지금까지 무려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충칭난루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요. 입시 학원이 몰려 있는 타이베이 기차역 뒷편에서 중고등학생들은 학원 교재를 이곳 산민서국에서 샀기 때문에 타이베이에서 입시를 준비한 웬만한 사람들은 산민서점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이곳은 타이베이 시민들에겐 추억의 서점이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지지를 받았기에 이렇게나 오래된 골동서점이 충칭난루에 살아남은 유일한 서점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산민서국은 1988년 타이베이 서점 중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된 최초의 서점이었습니다. 당시 타이베이의 서점들은 통로가 좁고 조명이 어두워서 책만 보고 사지 않는 손님들을 짜증스럽게 쳐다보던 책방 사장의 눈빛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런 책방의 양상에 익숙해져 있던 타이베이 시민들은 1988년 리모델링 후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서점이 생기자 상당히 놀라웠다고 합니다. 1988년의 산민서국은 세련되고 느낌있는 공간 그 자체였죠. 마치 백화점처럼 통로가 넓고 조명이 밝았으며 에스컬레이터가 있었다. 4층짜리 건물에 책들은 질서정연하게 분류돼 있고, 책을 꼭 사지 않아도, 오후 내내 계단에 앉아 책을 읽는 손님이 있어도 쫓겨나지 않았죠. 이렇게 백화점 같은 널찍한 서점 공간을 산민서국이 마련하자 이듬해인 1989년 설립된 청핀서점(誠品書店)도 계속 빛을 발하며, 서점 바닥이나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모습은 독서 풍조가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내내 자리할 수 있었습니다.
1층부터 4층까지 설치된 에스컬레이터로 간편하게 이동 가능하다. - 사진: Rti 서승임
2024년, 산민서국은 1988년 리모델링 이후 크게 개조하지 않았고, 30여 년의 세월이 쌓여 이제는 복고미가 가득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질서정연하게 분류된 책들 뿐입니다. 산민서국이 자체적으로 펴낸 시리즈물이 서점 내 가장 눈에 띄는 책꽂이에 꽂혀 있는 것을 보면서 출판계 불황인 지금에도 꾸준히 책을 내고 있는 출판사 겸 서점에 깊은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출판사 자체에서 책을 내고, 매장까지 갖추는 이곳만의 남다른 근성이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도 전문서점으로서 존엄성을 유지하게 해주었는지도 모릅니다.
진스탕 서점(金石堂書店)
올해 3월 초, 타이베이 티엔무(天母) 상권에 타이베이의 또 다른 옛 서점이 새로 오픈한다는 소식이 들려 서점을 그리워 하는 제게 왠지 모를 따뜻한 느낌이 전해졌는데요. 타이완 중앙사(中央社, CNA)의 한 보도에 따르면 티엔무의 다카시마야 백화점에 진스탕(金石堂) 서점이 새로 분점을 냈다고 합니다.
진스탕 서점은 티엔무라는 동네의 문화적 가치를 높이 사며, “과거 티엔무의 문화유산은 헛된 것이 아니고, 서점에 대한 티엔무 사람들의 열정은 식지 않았기에 우리 서점은 기회를 포착하여 독서의 씨앗을 계속 싹트게 하고, 티엔무의 문화유산을 풍부하게 할 것”이라며, 티엔무 사람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1982년에 처음 설립된 진스탕 서점은 2001년에는 분점 점포수가 102점까지 증가해 타이완 전국에서 가장 잘가는 전성기를 누린 바 있는 서점입니다. 그런데 2018년 아까 말씀드린 ‘서점 거리’ 충칭난루의 분점이 폐업한 데다가 작년에는 타이베이 최대 상권가인 신이점까지 폐업하면서 현재에 타이베이에는 총 6점, 타이완 전국에는 총 35점 밖에 남지 않게 되었죠.
이런 서점 불경기 속에 진스탕 서점이 용기를 해 백화점 안에 새로운 분점을 개장했다는 소식은 참 반가웠습니다.
그렇게 3월 초 티엔무의 다카시마야 백화점 4층에 새로 분점을 낸 진스탕 서점은 지난 24일까지 서점에 직접 와 구매를 할 경우 500 뉴타이완달러 구매 시 50 뉴타이완달러를 할인, 회원의 경우 10% 할인하는 등 각종 행사를 진행하며 티엔무 시민, 넓게는 타이베이 북부에 사는 독서쟁이들을 이곳으로 불러모았습니다.
이외에도 1952년에 외국어 교과서를 전문적으로 출판 판매하기 위해 설립된 둔황서국(敦煌書局) 등, 세련된 문화 복합 공간 대신 온전히 책을 팔고 사고, 읽고 즐기기 위한 서점의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며 영업을 이어가고 있는 서점들이 타이베이에 남아있습니다.
스마트폰의 영상 매체에 익숙해져 손으로 직접 종이를 넘겨가며 책을 읽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가는 요즘, 타이베이에 남아있는 이런 오래된 서점들은 종이로 만든 책을 구매하고 읽는 것이 여전히 귀중한 문화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대신 알려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청취자님께서도 오늘 방송을 들으시고, 자신만의 서재로 가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책 한 권 꺼내 읽어 보시는 것 어떠세요?
엔딩곡으로는 타이베이의 오래된 마을 다다오청(大稻埕) 출신의 피아니스트 린커쉰(林可薰)이 연주하는 ‘아빠의 서재(爸爸的書房)’를 띄워드립니다.
서승임 徐承任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