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일요일, 타이베이에는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한낮 30도를 웃도는 더운 날씨가 계속되었던 지난주의 무더위를 씻어 주었죠. 오후 타이베이 북쪽에 위치한 단수이(淡水)에는 비가 타이베이 시내보다 거세게 내리더군요. 단수이는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촬영지로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지역입니다. 또한 101 타워가 있는 신이취(信義區)에서 시작하는 지하철 홍색선의 북쪽 끝 종점역이 있는 곳이기도 하죠. 단수이는 타이베이시가 아닌 신베이시(新北市)에 속합니다만, 오늘 <어반스케처스 타이베이>에서는 타이베이에서 멀지 않은 단수이에서 지난 주말 벌어진 한 풍경을 소개해드립니다.
지하철 단수이역 1번 출구에서 나와 바다와 인접해있는 단수이 옛 거리(淡水老街)를 등지고 주택과 상점들이 몰려 있는 동네를 향해 10분정도 걸어가면 런아이제(仁愛街)의 작은 가게에서 흥겨운 음악 소리가 들립니다. 바로 타이완의 한인 전통음악인 베이관(北管) 연습실입니다. 단수이에는 역사가 깊고 유명한 한 전통음악단체가 있습니다. 바로 단수이남북헌(淡水南北軒)입니다. 단수이남북헌은 1917년 단수이에서 힘들게 일하는 노동자들의 오락 수단으로 설립되었습니다. 과거 단체 구성원들은 주로 단수이항 부두 노동자, 노점상, 인력거꾼 등이 많았으며, 오늘날에는 젊은 학생들을 포함해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베이관을 연주하기 위해 모입니다.
지난 7일 일요일, 단수이남북헌 연습실(淡水南北軒團練館)에서는 타이완의 전통음악인 베이관 연주자들과 국립대만대학 인도네시아 발리 가믈란음악 연주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가믈란 수업을 위해 직접 발리에서 타이베이로 온 팍 뇨만 윈다(Pak Nyoman Windha) 선생님 내외를 모시고 인도네시아와 타이완 전통음악 간의 교류를 도모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지난 편에서 소개해드렸다시피, 인도네시아 발리에는 가믈란(Gamelan)이라는 전통음악이 있는데, 건반이 있는 악기류 외에도 타악기로만 구성된 악기 조합이 있습니다. 이를 벨라간주르(belaganjur)라고 합니다. 용어는 낯설지만 악기의 구성은 간단합니다. 서양의 심벌즈와 같이 악기의 평평한 면을 서로 맞부딪혀 소리를 내는 챙챙(ceng ceng), 말렛을 들고 두드리는 타악기이지만 음고가 있는 레용(reyong), 그리고 악기 전체를 지휘하는 드럼이 있죠. 드럼은 한국의 장구와 같이 바닥에 두고 북의 양 면을 함께 연주합니다. 대신 채를 들지 않고 양 면 모두 손으로 연주하죠. 심벌즈와 같은 챙챙은 그 소리가 꽤나 쩌렁쩌렁한데 한국의 꾕과리에 비해 음질이 날카롭고 음고도 높습니다. 레용은 한 사람이 하나의 악기를 들고 하나의 음만 연주합니다. 대신 옆사람과의 호흡이 상당히 중요하죠. 내가 A라는 리듬을 반복하고 옆 사람은 B라는 리듬을 반복하면 청중들은 C라는 새로운 리듬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날 연주한 인도네시아 발리의 벨라간주르를 직접 들어보시죠.
군악대처럼 벨라간주르의 목적은 군대와 함께 전투에 참여해 적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주는 데서 시작했다고 합니다. 벨레간주르는 문자 그대로 ‘걸어다니는 전사들의 가믈란’을 의미하죠. 그러나 오늘날 군악대가 정상회담, 외빈 초대 등 국가 행사에서 주로 사용되듯 벨라간주르 역시 대부분 전쟁 대신 축제, 경연대회, 의식에서 입장할 때 연주된다고 합니다. 전반적으로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와 반복되는 리듬을 가진 벨라간주르는 타이완의 베이관과 그 음질과 진행이 상당히 유사합니다. 이 날 인도네시아 발리 가믈란팀이 벨라간주르로 대화의 포문을 열자 베이관 단체는 자신들의 레퍼토리로 화답했습니다.
타이완의 베이관도 발리의 벨라간주르처럼 주로 길거리를 행진하면서 연주하는 용도로 많이 사용됩니다. 제가 <어반스케처스 타이베이> 15번째 시간에 다안취 루이안제(瑞安街)를 소개하면서 베이관이 안동시장 주변 도로를 행진을 하며 연주했다고 말씀드렸듯이 말이죠. (다시듣기) 이 날 연주한 베이관은 최소한의 악기만 갖고 연주했는데요. 기본적으로 악단 전체에서 지휘자 역할을 하는 샤오구(小鼓, 작은 북)와 박자를 일정하게 맞춰주는 샤오뤄(小鑼, 작은 징), 벨라간주르의 챙챙과 같은 심벌즈 역할을 하는 차오(鈔)가 있습니다. 곡에 따라 관악기인 숴나(嗩吶)가 출현해 선율을 연주하기도 합니다.
이 날 두 단체가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음악을 들으며 서로의 공통점을 찾아나갔습니다. 단수이남북헌의 베이관 연주자들은 모두 타이완 사람들이었고, 인도네시아 음악은 이 자리를 통해 생전 처음 들어봤습니다. 인도네시아 발리의 벨라간주르를 연주하는 타이완 사람들 중에서도 베이관 연주단체를 처음 본 사람도 있었죠. 서로의 음악과 악기에 대한 낯섬, 긴장감은 상대가 연주하는 음악의 소리와 리듬과 함께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베이관 연주자들, 특히 심벌즈와 유사한 차오(鈔)를 연주하는 연주자들은 벨라간주르의 리듬에 맞춰 자신의 악기를 두드립니다. 반대로, 베이관 연주자들이 연주할 때 벨라간주르 연주자들은 베이관의 주요 리듬에 맞춰 자신의 악기로 응답합니다. 벨라간주르와 베이관의 가장 큰 공통점은 바로 징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공(gong)이라고 부르고 타이완에서는 다뤄(大鑼)라고 부르는 이 악기는 한국의 징과 같이 걸이에 걸어놓고 음악의 단락이 시작하거나 끝날 때 한 번씩 연주해 연주자들에게 음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연주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유사한 리듬과 악기 소리, 음악의 구조를 체득해가며 두 단체는 가까워졌습니다.
아시아의 전통음악과 서양의 클래식 악기들과의 조합은 우리가 제법 자주 보고 듣습니다만, 아시아의 서로 다른 국가들의 전통음악을 한 자리에서 듣고 게다가 합주까지 하는 자리는 드물죠. 서로 다른 지역에서 발전된 두 전통음악의 마지막 공통점은 연주자 한 명의 천부적인 재주보다 여러 사람들 개개인의 악기 소리가 합쳐져 하나의 소리를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하고 값지다는 것입니다. 이 날 단수이남북헌에서 울려퍼진 인도네시아 벨라간주르와 타이완 베이관의 연주 소리는 연습실 밖으로 제법 무섭게 쏟아지는 장대비 소리도 덮을 만큼 우렁찼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하나의 리듬을 함께 연주하며 서로 교감했습니다.
서승임 徐承任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