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오늘 <어반스케쳐스타이베이>에서는 타이완의 여성주의(Feminism) 관련 주요 공간인 두 곳을 소개합니다.
여성 노동자들의 운동에서 유래된 세계 여성의 날은 1977년 UN이 3월 8일을 공식적으로 지정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유래가 된 여성 노동자 운동은 1900년대 초 미국과 유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08년 미국 노동자 10만여 명이 뉴욕 거리를 가득 채웠고 특히 여성들이 대규모로 참여해 노동시간 단축이나 임금 인상, 여성 투표권 문제에 관해 크게 외쳤습니다. 그리고 1909년 미국사회당에서는 여성의 날을 발표했고, 1910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여성 노동자 국제 컨퍼런스에서 여성의 날을 국제 기념일로 해야한다는 여권운동가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1857-1933)의 제안으로 1911년부터 오스트리아, 덴마크, 독일, 스위스에서도 여성의 날을 기념하기 시작했습니다.
페미니즘이라고 알고있는 여성주의의 출발은 간단합니다.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정치적, 법적, 경제적 권리를 갖겠다는 데서 출발했죠. 이 간단한 문제가 150여년 전만해도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죠. 페미니즘이란 용어는 1837년 프랑스의 사회학자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 1772-1837)가 처음 사용했으나, 실제 관련 운동의 선구자는 1792년 ‘여성권리옹호’를 작성한 영국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1759-1797)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타이베이 다안취(大安區) 국립대만대학 캠퍼스 맞은편인 신성난루(新生南路)의 한 작은 골목길 초입에 있는 뉘수디엔(女書店, 여서점)이란 이름의 작은 서점이 있습니다. 좁고 높은 계단을 따라 건물 2층으로 올라가면 넓지는 않지만 있을 건 다있을 것 같은 정도의 공간의 사면이 여성주의, 즉 페미니즘 관련 서적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서구에서 유래된 페미니즘의 역사적, 이론적 배경을 소개하는 다양한 번역서 외에도 타이완에서의 여권 신장 운동 역사나 타이완 여성 문학가 등 타이완에서의 페미니즘 이슈를 다루는 서적들이 특별히 인상적입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책 중 하나는 바로 《物的向度: 女建築家的工作日常》입니다. 타이완 여성 건축가 학회에서 2021년 출간한 이 책은 여성 건축가의 시선에서 본 일상의 오브젝트들을 다룹니다. ‘건축가’ 하면 여전히 남성이 가장 먼저 연상되던 제게 신선한 충격과 건축을 보는 새로운 시선을 알려준 고마운 책이죠. 2018년 정식으로 설립된 타이완 여성 건축가 학회(台灣女建築家學會 Women in Architecture Taiwan)는 여성의 이야기, 목소리, 끈기라는 세 가지 관점으로 건축을 재사유할 것을 주장합니다.
다양한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페미니즘 서적들이 있는 뉘수디엔(女書店) 건물의 1층에는 마녀 하우스라는 뜻의 뉘우디엔(女巫店)이 있습니다. 타이완에서 현재 활동하는 인디 밴드들이 한 번씩은 꼭 거쳐가는 라이브 하우스입니다. 10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서 밴드의 무대를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곳이죠. 그렇다면 왜 라이브 하우스의 이름을 마녀를 뜻하는 ‘뉘우(女巫)’라고 지었을까요? 타이완의 인디 씬과 여성문화의 관계에 대해 해석한 한 글에서는 뉘우디엔(女巫店)을 굉장히 상징적인 공간으로 소개합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타이베이 라이브 하우스 인디씬은 이곳 '뉘우디엔’과 ‘지하사회’(地下社會)라는 이름의 양대 공연장이 주요 무대였습니다. 남성적이고 하드코어한 밴드 음악을 주로 다루는 ‘지하사회’와는 대조적으로, ‘뉘우디엔’은 언플러그드 스타일의 음악과 여성 친화적인 인디 환경이 결합해 당시 사회 운동, 여성 운동, 게이 운동 사이의 공생과 협상을 상징했다고 합니다. 즉, 성별 포용성(inclusiveness) 기제로 당시 타이베이의 다양한 성별의 음악 문화를 지향하고 구현하고자 설립된 곳이 바로 ‘뉘우디엔’인 것이죠. 창립자인 펑위징(彭郁晶)은 “여성 뮤지션에게 더 많은 공간을 제공하고 여성들이 공연할 수 있는, 보다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공간을 재창조해 남녀노소 누구나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하는데 목적을 두었습니다. 1995년 이래 지금까지 뉘우디엔은 타이완 특유의 여성 음악 공간, 레즈비언의 청취 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출처: 辣台妹聊性別 Facebook)
한국에서도 최근 몇 년 사이에 매우 민감하고 논쟁적인 주제가 된 이 페미니즘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 쟁취를 위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페미니즘의 더욱 중요한 점은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결정하는 다양한 사회적 요인들, 이를테면 국가, 계급, 인종, 종교, 성적지향 등을 고려하면서 넓게는 여성을 중심으로 기존 사회 질서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가능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타이완과 한국 모두 현재에는 여성의 교육 수준이나 취업 기회는 남성과 그 격차를 거의 보이지 않고 있지만, 두 나라 모두 역사적으로 전통적인 유교 질서와 남아 선호 사상을 사회적, 개인적으로 체득한 사회였던 만큼 개인의 일상에서 여전히 남녀차별 문화를 빈번히 체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성주의는 각 국가, 사회, 지역에서 서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만, 그 취지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성별의 문제로 차별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 있는 것 같습니다.
2023년 현재, 여러 국가에서 여성 인권이 증진된 것은 사실입니다. 대표적으로 타이완에서는 처음으로 여성 총통인 차이잉원이 연임을 하고 있고, 2021년 미국에서는 카멀라 해리스가 미국 최초 흑인, 아시아계, 여성 부통령이 되었죠. 그 외에도 탄자니아와 에스토니아, 스웨덴, 사모아, 튀니지에서도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가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임신중지, 낙태, 여성학대, 여성할례, 이슬람 여성인권, 남녀 임금격차 등 여전히 국제적으로 관심갖고 해결해야 할 여성문제가 산재한 것도 사실입니다. 선진국이든 개발도상국이든 여성 관련 문제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뉘우디엔의 창립자 펑위징(彭郁晶)은 왜 가게 이름에 ‘마녀(女巫)’를 사용했는지에 대한 한 언론의 질문에 “과거 마녀는 영적 조언자나 테라피스트 역할을 하는 강력한 사람들이었다” 라며 과거 서구 고대 사회에서 마녀는 종종 이단으로 비난받고 차별을 받았지만, 펑씨는 마녀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하며, 마녀 스스로가 강력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사회의 압력에 저항하고 자기 자신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요? 라며 되물으며, 외롭지만 강력한 투쟁의 정신을 강조했습니다. (출처: 뉘우디엔 20주년 보도 那些年我們戀過的女巫店《報道者》2015/12/17 ) 세계 여성의 날인 오늘만큼은 특별히 "국가와 지역사회의 역사에서 특별한 역할을 해온 평범한 여성들의 용기와 결단력을 기리고, 변화를 촉구하며, 그 동안의 변화와 진전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요? 엔딩곡으로는 2015년 뉘우디엔의 20주년 공연에 출연한 뮤지션 중 한명인 정이눙(鄭宜農)의 ‘너에게 가는 여정(去你的旅程)’을 띄워드립니다. 인디 씬에서 시작해 이제는 메이저급 가수가 된 정이눙은 2020년 가을 뉘우디엔에서 통기타 하나를 들고 이 노래를 불렀는데요. 뉘우디엔이 지향하는 언플러그드 감성과 너무나 어울리는 노래입니다. (정이눙 뉘우디엔 공연 YouTube 2020/09/17 )
*“A time to reflect on progress made, to call for change and to celebrate acts of courage and determination by ordinary women who have played an extraordinary role in the history of their countries and communities.”(출처: United Nations International Observances)
- 서승임 徐承任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