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 도심은 좁은 폭의 골목길로 가득합니다. 1차선 도로 폭의 길 한켠에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정도의 보행길이 있는 골목길 양 옆은 오래된 나무와 5층 이하의 가정집 건물, 그리고 작은 상점들로 차있습니다. 높고 화려한 마천루 뒤 작은 골목으로 점점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햇살 좋은 날, 처음 가보는 골목길을 두 발로 걸을 때 느끼는 설레임과 골목길 마다 서로 다른 가게들을 구경하는 재미를 선사하는 <어반 스케처스 타이베이>의 ‘골목길 시리즈’ 두 번째 시간, 오늘의 골목길은 바로 티엔위제(天玉街)입니다.
타이베이 도심에는 외국인인 제게 가장 친숙하게 다가오는 지역이 한 곳 있습니다. 바로 티엔무(天母)입니다. 타이베이에 온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어느 날, 티엔무동루(天母東路)와 티엔무시루(天母西路)가 만나는 티엔무 광장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중산베이루 7단(中山北路7段) 길을 걸어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멀게만 느껴졌던 양명산이 바로 눈 앞에 있고, 저 멀리 양명산 꼭대기에 있는 문화대학교 건물이 보입니다.길 양옆으로는 영어로 써있는 버거 집이나 피자 집이 눈에 띄고, 조그만 미용실에도 중국어와 영어가 함께 써있어서 당시 중국어가 익숙치 않았던 제게 매우 친숙하게 다가왔죠. 게다가 1층의 상점 뒤로는 세워져 있는 타이베이 시내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새 고층 아파트가 마치 한국의 주상복합과 같은 친숙함을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타이베이 생활이 아직 익숙치 않아 어느 곳을 가던 낯설었던 제게 티엔무는 처음 발을 딛자 마자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은 안식처로 다가왔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급하지 않고 여유로웠습니다. 길거리에 타이완인 외에도 많은 외국인들이 보여 친숙했습니다. 인근에 지하철역이 없다는 불편함이 있지만 그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 갈만큼 편안했습니다. 그래서 매주 일요일, 미사를 드리는 성당이 있는 티엔무로 향하는 길이 멀지만 행복하게 느껴졌죠. 일요일이면 일부러 시간을 내어 곳곳의 골목길을 산책하곤 했습니다. 양명산 산자락에 위치해있고 영어 간판이 즐비하며 고급스런 고층 아파트가 있는 티엔무. 처음 걸었던 중산베이루 7단 길 바로 옆 티엔위제 골목은 보다 ‘티엔무스러운’ 정취를 느끼게 합니다.
티엔무는 타이베이 시내를 관통하는 지룽강을 중심으로 북쪽에 위치한 스린 취(士林區)와 베이터우 취(北投區)의 특정 지역을 지칭합니다. ‘티엔무스럽다’ 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이유는 티엔무가 다른 타이베이 지역과는 다른 분명한 특징이 있어서 겠죠? 타이완 사람들에게도 티엔무는 조금 특별한 곳인 것 같습니다. 한 보도에 따르면 티엔무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스린이나 베이터우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티엔무라는 이름을 강조하는지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논쟁이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막상 ‘진짜’ 티엔무 사람은 자신을 일부러 티엔무인이라고 강조하지 않고 조용한데 오히려 외부에 살다가 이사한 사람이 자신의 몸값을 올리기 위해 일부러 강조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는데요. 그만큼 티엔무는 타이베이에서 재력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소위 부자동네로 알려져있습니다.
게다가 티엔무는 일본인, 미국인, 유럽인 등 다양한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타이완에서 근무하는 한국의 법인 주재원들도 이곳 티엔무에 많이 거주합니다. 이들의 자재들은 대부분 티엔무 광장 바로 아래, 중산베이루 6단(中山北路6段)에 위치한 타이베이 미국 학교(Taipei American School)란 국제학교로 통학합니다. 그 맞은편엔 타이베이 일본 학교(Taipei Japanese School)도 별도로 있어, 이곳 티엔무에 상당수의 일본인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외국인이 많이 모여 사는 티엔무는 한국전쟁 종료 후 1955년 창설된 미군 부대(U.S. Taiwan Defense Command)가 주둔했던 부대였습니다. 미군 부대가 여전히 주둔하고 있는 한국과 달리 타이완의 미군 부대는 미국이 1979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해체되었지만, 현재에도 티엔무공원과 티엔위제 사이에 남아있는 티엔무 화이트 하우스(天母白屋)가 그들의 흔적을 느끼게 합니다. 마치 한국 용산 미군 기지 인근의 이태원이나 이촌동에 다수의 미국인이 거주했고 지금도 다수의 외국인들이 거주하는 것처럼, 티엔무도 미군 부대는 해체되었지만 현재까지 외국인들이 거주하는 마을로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티엔위제는 이러한 티엔무의 역사와 특징을 담고 있는 가장 ‘티엔무스러운’ 골목길 중 하나입니다. 티엔무 광장을 중심으로 서쪽에서 양명산 방향으로 뻗어있는 티엔위제 길의 초입에는 마당이 있는 스타벅스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햇살 좋은 날이면 마당에 놓인 서너개의 테이블에는 항상 만석입니다. 그 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앞서 말씀드린 고층의 고급 아파트들이 있는 동네가 이어집니다. 여러 동이 함께 모여 단지를 이루는 한국의 아파트와 달리 타이완의 아파트는 하나의 동만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마치 한국의 주상복합건물 같이요. 고급스런 색감과 자재의 아파트 건물 사이를 지나가다 보면, 주말을 맞아 동네 주민들이 대형견을 끌고 산책을 하거나 편한 옷차림으로 나와 주변의 식당을 찾는 가족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오른쪽 한 켠에 일본인 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카페도 만날 수 있습니다. 타이완 중부의 아리산에서 재배한 커피콩을 직접 볶아 커피를 내리는 5평 남짓의 이 작은 카페 역시 늘 동네 주민들로 북적입니다. 일본어 엑센트가 녹아있는 사장님 부부와 한국어 엑센트가 남아있는 제가 서로 중국어로 대화하는 일도 참 재밌습니다. 맛과 향이 좋은 커피는 말할 것도 없고요. 카페 외에도 이 골목에는 사이클링 등 운동용품이나 유럽 골동품을 파는 작은 가게도 있습니다. 가게나 아파트 건물에서도 여전히 외국의 향기가 짙게 남아있는 티엔무의 티엔위제 골목. 타이베이의 여느 길과는 사뭇 다른 독특한 정취가 남아있는 이 골목길이 타이베이의 이방인인 제게 유독 따뜻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저마다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도 서로 교류하고 어우러지는 정을 느낄 수 있어서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엔딩곡으로는 타이완 가수 장레이(江蕾)의 ‘골목길’(小巷)을 띄워드립니다. 60-70년대 음반을 제작한 타이완의 신여명음반회사(新黎明唱片有限公司)에서 출시한 LP판 음반 발행번호는 SLM으로 시작하는데요. 1977년 8월 출시한 장레이 앨범의 레이블은 SLM-5061입니다. 이 앨범 사이드 B의 3번째 트랙에 있는 ‘골목길’은 느린 스윙 리듬에 두왑 장르를 중화풍으로 표현한 노래입니다. 77년 노래라 생각되지 않을 만큼 세련된 사운드에 장레이의 고급스런 목소리가 더해져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마치 외국 정서가 가득 녹아있는 티엔무의 티엔위제 골목길을 걷는 것처럼요.
- 서승임 徐承任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