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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역사를 바꾼 '야생 백합 학생운동(野白合學運)'

  • 2024.03.13
랜드마크 원정대
1990년 3월 16일부터 타이베이 중정기념당 앞 광장에서 일어난 '야생 백합 학생운동(野白合學運)' - 사진: 츄완싱(邱萬興)

타이완 곳곳에 랜드마크를 찾아 현지인만 아는 이야기를 알려드리는 <랜드마크 원정대> 시간입니다. 이제부터 가이드북을 버리세요! <랜드마크 원정대>를 따라 타이완 여행을 즐깁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랜드마크 원정대>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최근 중국 어선 전복 사건으로 양안 간 긴장국민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타이완해협 정세에 관심이 쏠립니다. 차기 총통으로 당선된 라이칭더(賴清德) 현 부총통의 취임식을 2달 앞두고 여러 차례 협상을 거쳤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불안 요소가 여전합니다. 온화한 봄철로 접어들었지만 시국은 어수선합니다. 

꽃이 만개하는 3월, 연분홍빛 벚꽃 물결 외에도 타이완 역사를 바꾼 야생 백합, 그리고 해바라기가 생각납니다. 1990년 3월 16일 대학생들이 중정기념당 앞 광장에서 6일 간의 농성 시위를 벌여 타이완 민주화를 새로운 단계로 발전시켰고, 2014년 3월 18일 대학생과 사회운동 세력이 23일 간의 국회 점령을 통해 ‘양안서비스무역협정(海峽兩岸服務貿易協議)’의 신속통과를 막았습니다. 전자는 ‘야생 백합 학생운동(野白合學運)’, 후자는 ‘해바라기 학생운동(太陽花學運)’입니다. 

야생 백합 학생운동으로 두각을 나타낸 이른바 ‘야생 백합 세대’ 중 일부는 학계에 입문해 인재를 육성하고, 일부는 사회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한편, 많은 이들이 정계에 발을 들여놓아 민진당 정부의 주축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야생 백합 세대로는 정원찬(鄭文燦) 행정원 부원장, 린자룽(林佳龍) 총통부 사무총장, 천지마이(陳其邁) 가오슝시장, 황웨이저(黃偉哲) 타이난시장, 웡쟝량(翁章梁) 자이현(縣)장, 민진당 소속 판윈(范雲) 입법위원, 정리쥔(鄭麗君) 전 문화부 장관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야생 백합 학생운동에서 총 지휘를 맡은 판윈(范雲) 현 입법위원 - 사진: 츄완싱(邱萬興)

마찬가지로 해바라기 운동에서 빛을 발한 이른바 ‘해바라기 세대’도 선배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최근 몇 년 간 잇따라 국회나 지방의회에 입성했습니다. 꽃으로 명명한 두 학생운동은 타이완의 정치 판도를 뒤집어 놓을 정도로 사회에 깊은 영향을 준 역사적 사건입니다. 앞으로 2주 동안 타이완 역사 상 최대 규모의 두 학생운동에 대해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타이완은 한국과 같이 1987년 민주화 시대가 열렸지만 당시의 정치적 개혁은 아직 갈 길이 멀었습니다. 계엄령이 해제되고 언론의 자유와 정당설립의 자유가 확보되면서 각종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며 사회 곳곳에서 술렁거리는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에너지가 대학 캠퍼스에까지 퍼져 학교를 사회적 실천의 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전 세계에서 벌어진 혁명의 물결도 타이완 젊은 세대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장징궈(蔣經國) 전 총통이 1988년 사망한 후 부총통이었던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이 헌법에 따라 총통직을 승계했습니다. 2년 후인 1990년 2월, 제8대 중화민국 총통 선거를 한 달 앞두고 부총통 인선 문제로 국민당 내부에서 심각한 권력투쟁이 벌여졌고, 결국 라덩후이를 비롯한 주류파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2월 정쟁’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장제스, 장징궈를 비롯한 장씨집안의 빠른 쇠퇴, 그리고 국민당의 내부 분열을 초래했으며 타이완 토박이인 본성인(本省人) 출신의 첫 총통, 리덩후이 정부의 전성시대를 예고했습니다.

같은 해 3월, 중화민국 국회였던 ‘국민대회(國民大會)’가 국민대회 대표의 임기를 연장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키자 각계의 비난과 규탄이 고조되었습니다. 1948년 출범 이래 단 한 번도 재선을 실시한 적이 없는 국민대회는 국회의원이 43년 간 연임, 스스로 임기를 연장하는 등 전대미문의 악례를 남겼습니다. 당시 총통, 부총통은 지금처럼 유권자의 직접 선거가 아니라 국민대회에서 간접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는데, 국민의 대리인으로 자처하는 국민대회 대표들은 연세가 일흔이 넘어도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아래 대학생들이 거리에 나섰습니다.

3월 16일, 국립타이완대학교 학생 9명이 ‘우리는 황제 700명의 착취를 계속 용인할 수 있을까?’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중정기념당 앞 광장에서 농성시위를 펼쳤습니다. 700명의 황제는 바로 1948년 중국대륙에서 선출된 후 국공내전으로 무제한 연임한 국민대회 대표들입니다. 언론의 보도와 학생들의 호응을 통해 시위 참여자는 빠른 속도로 2,000명을 넘어 전국적인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설립된 지 5년도 안 된 민진당도 연설 등 실제적인 행동으로 학생들을 성원했습니다.


지난 2020년 3월 16일  야생 백합 운동 30주년을 맞아 시민단체들이 자유광장에서 운동 당시와 똑같은 현수막을 들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 사진: CNA

시위대의 규모가 빠르게 커지면서 학생들은 지휘팀을 결성해 정부에 4대 요구를 제출했습니다. 첫째 국민대회 해산, 둘째 1948년 선포, 중화민국 헌법을 능가한 ‘동원감란시기 임시조관’ 폐지, 셋째 국가의 기본 방침을 논의하는 국시(國是)회의 개최, 넷째 구체적인 민주개혁 시간표 제출. 이 4대 요구는 당시 타이완 국민이 민주화에 대한 갈망을 입증했을 뿐만 아니라 훗날 타이완 민주개혁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시위 나흘째가 되던 3월 19일 학생 10명이 단식투쟁을 시작해 21일까지 4대 요구에 응답할 것을 총통과 행정수반에게 촉구했습니다. 같은 날 저녁, 학생 총회는 운동의 상징으로 타이완 고유종인 야생 백합을 채택했습니다. 야생 백합이 가진 생명력, 순수함, 숭고함 등이 운동의 핵심 정신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입니다. 다음날인 20일 총통부는 보도 자료를 통해 4대 요구에 대한 정면 대응을 선언하고 나섰습니다.

제8대 중화민국 총통 선거일인 3월 21일, 막 당선된 리덩후이 전 총통은 총통부에서 학생 대표 53명을 접견했고 4대 요구를 승낙했습니다. 합의가 된 후 학생 총회는 22대 1의 압도적인 표차로 22일 아침에 광장에서 철수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시위가 무사히 끝나자 리덩후이 정부는 타이베이 그랜드 호텔에서 국시회의를 열었고, 회의에는 정부 고위층 뿐만 아니라 민진당 고위층, 메이리다오 사건 참여자, 해외로 망명한 정치범 등 반정부인사도 참여했습니다. 그 후 10년 동안 학생들이 제시한 4대 요구가 잇달아 실현되면서 ‘만년국회’라고 조롱받던 국민대회는 1991년에 해산된 데 이어 지방장관 직선, 총통 직선도 이루어졌습니다. 리덩후이는 평화적인 민주화와 정권교체를 이루는 데 큰 기여를 하여 ‘타이완 민주주의의 아버지’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야생 백합 운동을 통해 타이완은 민주주의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 동안 권력을 잡은 정부가 왜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었을까요? 많은 학자들은 리덩후이는 학생운동을 명분 삼아 국민당의 반대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했다고 봅니다. 학생 대표 하나였던 린스쟈(林世嘉) 전 입법위원에 따르면, 리덩후이는 “나는 빽이 없어서 학생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한 바 있습니다. 아무런 배경이 없는 리덩후이는 탁월한 정치적 수완으로 독재정권을 종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타이완의 민주화를 실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타이완의 앞길을 위해 나선 학생들, 그리고 대세를 살피는 국가 지도자가 없었다면 타이완은 평화적인 방식으로 민주화 시대를 열 수 없었을 겁니다. 학생운동이 벌어진 광장도 2007년 자유 광장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엔딩곡으로 야생 백합을 주제로 한 노래 ‘야생 백합도 봄이 있다(野百合也有春天)’를 띄워드리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주는 계속해서 해바라기 운동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오늘 <랜드마크 원정대>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
1. 邱萬興,〈看見野百合學運世代崛起!〉,歷史學柑仔店。
2. 〈臺灣戰後學生運動回顧特展—野百合學運〉,中研院社會所。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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