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 곳곳에 랜드마크를 찾아 현지인만 아는 이야기를 알려드리는 <랜드마크 원정대> 시간입니다. 이제부터 가이드북을 버리세요! <랜드마크 원정대>를 따라 타이완 여행을 즐깁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랜드마크 원정대>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2024 중화민국 대선 및 총선 전날인 지난 1월 12일 저녁, 타이완 남부 자이시(嘉義市)에서 중앙분수대(中央噴水池)를 기준으로 그 이북은 여당 민진당, 그 이남은 야당 국민당과 민중당 세력이었습니다. <공직자 선거·파면법>에 따르면 선거유세는 투표일 전날 밤 10시까지만 가능하며, 투표일 당일에는 모든 선거운동이 금지됩니다. 따라서 이날 후보자 모두 마지막 기회를 잡아 총력전을 벌였습니다.
정당이 각각 다른 곳에서 유세를 벌이는 대부분 도시와 달리, 자이시 선거구의 후보자들은 정당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선거 전야에 유세차량에 올라가 중앙분수대 주변을 돌면서 유권자들을 동원해야 하는데요. 현지인들은 유세가 성공할수록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자리에서 여러 가지, 심지어 서로 대립되는 응원 구호를 동시에 들을 수 있는 특이한 장면이 형성됩니다. 또한 충돌을 막기 위해 경찰은 경계선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분수대 주변에서 대기합니다.
지난 1월 12일 저녁 자이 중앙분수대의 선거유세, 분수대 이북은 여당 민진당, 그 이남은 야당 국민당과 민중당이었다. - 사진: CNA
자이시 한가운데에 있는 중앙분수대는 청나라 시대에 성곽이었고, 일본 식민지 시대에 들어 도시계획과 수도공사로 분수대가 지어졌고 주민들의 휴식공간이 되었습니다. 자이 출신, 타이완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화가 청천보(陳澄波)가 1930년대 분수대 일대의 경치를 담은 회화 작품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1935년 일본 식민통치 40주년을 맞아 타이완 곳곳에서 성대한 타이완박람회가 열린 가운데, 일본 정부가 후지산보다 높은 신고산(즉 玉山 위산/옥산, 일본 시대 新高山 신고산이라고 불림), 그리고 아리산을 홍보하기 위해 분수대에서 ‘신고산 및 아리산 등산로 입구(新高阿里山登山口)’라고 적혀있는 네온 간판을 세웠습니다. 박람회가 끝난 후에도 광고간판으로 계속 쓰였는데, 이를 주민 입장에서 생각하면 아름다운 공원을 잃어버린 것과 같았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1941년 간판을 없애고 다시 분수대의 원래 모습으로 복원했습니다.
일본 식민지 시대의 중앙분수대 - 사진: 타이완 사진첩(https://collections.nmth.gov.tw/CollectionContent.aspx?a=132&rno=2004.008.0077)
그럼 이 분수대는 어떻게 선거 결과를 좌우하는 중요한 정치적 지표로 탈바꿈했을까요? 이는 지난주 소개해 드린 타이완 첫 민선 시장이자 첫 여성 지방 장관인 쉬스셴(許世賢) 덕분이었습니다. 쉬스셴은 1956년 국민당에서 탈퇴해 1968년 자이시장으로 당선된 후, 자이를 잘 대표하는 랜드마크를 구축하도록 중앙분수대의 개축 공사를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쉬스셴의 정치 라이벌, 당시 자이현장(縣長)인 황라오다(黃老達)의 반대로 결국 분수대에 중화민국 국부 순원(孫文)의 동상을 세운다는 조건으로 공사가 마무리되었습니다. 국민당 일당독주 시대에 강권에 굴복하지 않는 쉬스셴은 시민들에게 신뢰를 받았고, 선거가 되면 분수대 주변에서 선거운동을 벌이곤 했습니다. 이로부터 중앙분수대는 권위에 반항하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자이시가 ‘민주의 성지’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 것도 여기서 비롯되었습니다.
1970년대의 중앙분수대 - 사진: 타이완기억(https://tm.ncl.edu.tw/article?u=022_002_00001038)
그러나 지금 분수대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은 국부가 아닌데요. 지난 2007년 낡은 동상은 갑자기 무너지면서 복원해야 하느냐는 논란이 일었습니다. 지지자들은 국부 동상이 지난 40년 간 자이의 발전을 지켜본 만큼 이미 이곳에 자리 잡았고, 따라서 원래 모습으로 회복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반대자들은 정치적 위인을 칭송하기 보다는 쉬스셴 전 시장 등 자이에 크게 기여한 사람, 또는 아리산 신목(神木) 등 자이를 잘 대표하는 상징을 세워야 지방을 중시하지 않는 관념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찬반 양쪽 외에 이참에 차라리 분수대를 철거해 교통질서를 바로잡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에 자이시정부는 중앙분수대는 역사적 의미가 크기 때문에 철거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오랜 논의 끝에 같은 해 12월 자이시에서 열린 ‘관악 페스티벌(Chiayi City International Band Festival)’을 맞아 자이시정부는 동상 자리에 관악제의 마스코트인 ‘관악병아리(管樂小雞)’ 조형물을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관악병아리는 무지갯빛이 나는 분수쇼 속에서 360도로 천천히 회전하면서 현지 주민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3년 후인 2010년, 타이완 등불축제가 자이시에서 처음 열리면서 관악병아리는 은퇴했고 분수대는 물고기 같기도, 용 같기도 한 새 주인을 맞이했습니다. 다만 관악병아리든 등불이든 모두 일시적인 행사를 위한 것이었는데, 현재 분수대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자는 타이완 야구 역사를 바꾼 레전드 선수 우밍졔(吳明捷)입니다.
이완 야구 역사를 바꾼 레전드 선수 우밍졔(吳明捷)의 동상 - 사진: CNA
2014년 일본 식민지 시대 자이 농림업전문학교(嘉義農林學校) 야구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시대극 영화 <카노(KANO)>가 개봉되자 타이완의 야구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일본어로 카노라고 하는 이 야구팀은 일본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인 '고시엔(甲子園)'의 결승전에 진출한 첫 타이완 팀으로, 1931년 처음으로 고시엔에 입성해 준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일본인 감독 곤도 효우타로(近藤兵太郎)의 지도 아래 카노는 무명의 지방 야구단에서 일본 야구계를 깜짝 놀라게 한 전설적인 팀으로 탈바꿈했습니다. 한족, 원주민, 일본인으로 이루어져 있어 일본인에게서 ‘칵테일팀’이라 조롱당했으나 12년 간 타이완 북부지역 야구팀만 고시엔 진출할 수 있다는 역사를 바꾸며 고시엔 개최 이래 농업학교의 최고 성적을 기록했고, 2018년에 되어야 다른 일본 학교가 타이기록을 이뤘습니다. 타이완 야구 역사에 있어 카노는 수많은 우수 선수를 배출하는 야구 스타의 요람이었습니다.
카노의 에이스 투수이자 4번 타자인 우밍졔는 1931년 고시엔 타이완 예선 및 일본 본선의 모든 경기에서 다른 투수와 교체 없이 끝까지 혼자 등판한 ‘완투(Complete Game, CG)승’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예선 때 강팀을 상대하더라도 타이완 야구 역사상 최초의 ‘퍼펙트 게임(perfect game)’을 달성하는 등 놀라운 성과를 거뒀고 그해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습니다. 농업학교를 졸압한 후 일본 와세다 대학에 입학해 타격왕, 최강 타자로 잇달아 선정되었고 야구계에서 계속 빛을 발했습니다.
타이완 영화 역사를 바꾼 <하이자오 7번지(海角七號)>의 웨이더성(魏德聖) 감독이 카노의 이야기를 통해 위로받아 프로듀서로서 동명영화를 제작하기로 했습니다. 2014년 2월 2일 <카노>의 개봉식이 자이에서 열리면서 제작진과 출연진이 자이 기차역에서 중앙분수대까지 대행진을 펼쳤고 분수대에 도착하자 우밍졔 동상의 현판식도 시작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카노의 역대 선수들과 그들의 가족 및 후손, 곤도 감독의 학생들 모두 분수대에 모여 퍼레이드에 참여했습니다. 우밍졔의 투구 폼을 바탕으로 한 이 동상은 화가 청천보의 외손자 푸하오밍(蒲浩明) 조각가의 작품으로, ‘카노 1931’라고 불립니다. 특별한 이벤트나 명절을 맞이할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분장하기도 하는데, 지난 2022년 과학박람회를 맞아 우밍졔 동상은 우주인 코스튬을 입고 우주를 휩쓰는 투수가 되었습니다. 1983년 72세로 세상을 떠난 우밍졔는 직접 눈으로 분수대의 변화를 볼 수 없었지만 그의 정신은 영원히 자이사람들과 함께할 것입니다.
지난 2022년 과학박람회를 맞아 우밍졔 동상은 우주인 코스튬을 입고 우주인이 되었다. - 사진: CNA
카노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면 영화를 한 번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는 중앙분수대의 건설 과정도 볼 수 있습니다. 우밍졔 역을 맡은 전 야구 선수 차오유닝(曹佑寧)이 이 영화를 통해 연예계에 데뷔했습니다. 오늘 <랜드마크 원정대>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
1. 黃國芳,「嘉市選前之夜藍綠決戰中央噴水池,營造勝選氣勢」,CNA。
2. 黃國芳,「嘉市中央噴水池吳明捷雕像,變身太空人值班」,CNA。
3. 大正3年發行《臺灣寫真帖》第貳集,臺灣歷史博物館。
4. 歲月:嘉義寫真【第1輯】,臺灣記憶。
5. 新高阿里山登山口標示在嘉義市中央噴水池,國家文化記憶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