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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소(便所)’, 현대식 화장실의 시작

  • 2025.01.07
대만주간신보
일제시기부터 타이완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변기. 일제시기를 겪은 타이완인은 일본어 '변소(便所, 벤조)'라는 단어를 타이완어로 여전히 사용 중이다. - 사진: Unsplash의 Alex Simpson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는 일상생활의 필수품 변기. 흰색의 세라믹으로 되어 있는 변기에 앉아 배변을 하고 레버를 내리면 변기 뒤에 저장되어 있던 물이 내려가면서 변기 안의 오물을 쓸어내려가죠. 변기는 내 집과 동네의 공공 화장실은 물론 심지어는 외국에서도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문화이죠. 

그러나 100년 전, 화장실이 지금과 같은 변기로 되어있었을까요? 오늘 <대만주간신보> 시간에는 일제시기 타이완의 화장실 문화가 어떻게 바뀌기 시작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6세기 무렵, 프랑스 파리 사람들은 야외에서 아무데나 용변을 해결했고, 실내에서는 변기를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집 안의 변기를 비워야 할 때는 창문 밖으로 뿌리면서 "물 조심하세요!”이라고 외치는 것으로 사전 경고를 대신했다. 타이완에 살았던 선조들도 19세기 말까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남자들은 용변이 급할 때 들판이나 나무 아래, 우물가, 집 앞 어디에서나 용변을 볼 수 있었으니, 천지가 모두 화장실이었던 셈이다. 급하지 않을 때는 땅을 파서 만든 구덩이에 배설물을 남겨 논밭의 거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여자들은 몸을 가려야 했기 때문에 남자처럼 아무 곳에서나 용변을 볼 수는 없었고, 대신 방 안에 큰 요강을 두었다. 여자들이 방 안에 요강을 두고 사용하는 생활습관은 꽤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50대의 한 타이완 작가는 30년 전에 타이완 남부 농촌에 살던 외할머니 방에 여전히 나무로 만든 요강을 사용했던 모습을 기억한다고 회고한다. 집 밖에 쪼그려 앉는 방식의 변기가 있는 화장실이 있지만 오히려 방치된 채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1895년으로 되돌아가 보면, 일본이 타이완을 점령했을 당시 타이완은 아직 현대화된 화장실 문화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런 화장실 문화는 일본 정부의 공권력 개입을 받으며 강제로 조정되기 시작했다. 

일본이 타이완을 점령한 지 2년 차에 타이완 전역은 여전히 전란 중이었다. 곳곳에서 민병대가 외국 정부의 통치를 거부하며 크고 작은 전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타이완의 이러한 위생 문제에 주목해 야외의 아무데서나 용변을 보는 불량한 풍속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이를 어길 경구 구금 또는 벌금형에 처했다. 그러나 길가에서 소변을 본다고해서 벌금을 물리는 것은 당시 타이완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기에, 한때는 일본군에 항거하는 중대한 이유로 거론되기도 했다. 

1896년 6월, 타이베이 지역의 잔전(詹振), 린리청(林李成)은 500명을 이끌고 난강(南港)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이 발표한 격문에는 일본군의 ‘8가지 죄상’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 내용은 ‘하늘과 신을 공경하지 않는다’, ‘공자를 공경하지 않고 글자를 함부로 다룬다’, ‘탐관오리가 백성을 멸시한다’, ‘법을 존중하지 않고 사적인 처벌을 한다’ 등이었으며, 마지막 항목은 바로 ‘소변을 보면 벌금을 부과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제 초기에 출판된 <풍속화보(風俗畫報, 1985-1912년 발행)>*의 ‘공대견문(攻台見聞)’에서 일본 종군 기자는 1895년 처음 타이베이 성에 갔을 때 본 거리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시내에는 크고 작은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어서 길거리에서 배설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중국 북부와 비교하면 훨씬 나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다른 여러 서적에서는 일본 통치 초기 상황에 대해 “비록 공중화장실은 마련되어 있었으나, 여전히 거리 곳곳에 배설물이 방치되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논리적으로 일본 정부는 주민들에게 길거리에서 용변을 보지 말라고 요구하려면 대체 장소나 해결 방안을 제공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1897년 5월, 타이베이 시에 처음으로 정부가 건설한 공중화장실이 등장했는데, 당시의 정식 명칭은 "공동변소(共同便所)"였다.

   *<풍속화보>: 이 책은 1895년 일본군이 타이완에 진격할 당시 일본종군기자의 타이완 전역 통신기사로 각종 공문서, 공고문 등 귀중한 문헌자료와 전투현장의 생생한 전투기사로 일본군의 타이완 침략 경과를 알 수 있는 훌륭한 읽을거리이다.

타이완어(臺語)*로 화장실을 '변소(便所)'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일본어 한자의 '변소'를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50년 동안 통치하면서 많은 일본어 용어가 타이완어에 남아있다. 일본어는 히라가나와 가타카나, 그리고 중국 문학에서 온 ‘한자’ 이렇게 세 가지 문자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타이완어는 원래 중국 본토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근대적인 개념이나 일본 특유의 사물에 대한 이해는 일본 통치 시기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일본어 한자를 타이완어로 발음하는 단어들이 생겨났다. 예를 들어, 병원(病院, 중국어로는 醫院), 주사(注射, 중국어로는 打針), 폭격(爆擊, 중국어로는 轟炸), 도시락/벤토(便當)과 같은 단어는 지금까지도 사용된다.

   *타이완어(Taiwanese Hokkien): 중국어와 다른 타이완 민난인(閩南人)의 언어로, 현재 타이완에서 공식 석상보다는 일상 생활에서 주로 사용되는 언어다. 일제시기 타이완에 살았던 사람들 중 민난인은 중국어가 아닌 타이완어를 구사했다. 

최초의 공동변소는 타이베이 성내 동문,서문, 남문, 북문, 소남문 안에 5곳, 멍자(艋舺)에 3곳, 다다오청(大稻埕)에 4곳, 총 12곳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공중화장실이 청말 시기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화장실(땅을 파고 대나무와 풀로 대충 가린 형태)과 유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1910년부터 타이베이 청(台北廳)이 10만 엔을 들여 28개의 공동변소를 지었으며, 이는 연와(煉瓦), 즉 벽돌이나 삼나무를 사용해 만들어졌다. 내부는 대변과 소변 공간으로 나뉘었고, 각 공동변소에는 대변 칸이 4칸 이상, 소변 칸이 2칸 이상 있었다. 또한 손을 씻는 세면대와 수도꼭지가 설치되었고, 일부에는 전등도 있었다. 벽돌, 상수도, 전등과 같은 근대적 요소가 더해지면서 타이완의 공중화장실도 현대화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약 100년 전, 일본 정부는 공중 화장실을 건설해야 했던 주요 이유는 대부분의 가정에 화장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중국식 건물 내부에는 가장 번화한 타이베이 시가지의 상점들 조차도 독립된 화장실 공간이 없었다. 화장실은 모두 집 밖에 있고 여러 가구가 공동으로 사용했다. 1928년 자료에 따르면, 쇼와 초기(1920년대 말)까지 타이베이 시민의 약 90%가 집 안에 전용 화장실 공간이 없었다. 

물론 현대식 수세식 변기는 타이완에서 일찍부터 존재했으나, 대형 상점과 관공서 등 특정 장소에만 제한적으로 설치되었다. 1908년에 건설된 철도호텔의 화장실은 영국에서 수입해 온 자기제 변기를 사용했다. 문헌에는 이 변기가 수세식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철도호텔이 총독부의 통치성과를 과시하기 위한 상징적인 역할을 맡았던 점과 극도로 서구화된 시설이었다는 점, 그리고 수세식 변기가 이미 서구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수세식 변기가 있었을 것으로 가능성이 크다.

서양에서는 1596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대자인 존 해링턴(John Harington)이 밸브가 있는 수세식 변기를 발명한 것이 최초였다. 18세기 프랑스 왕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에 수세식 변기를 설치했으며, 심지어 변기에 앉아 손님을 접견하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청말기에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에  ‘동문관(同文館)’을 설치하여 외국어를 가르쳤는데, 그중 장더이(張德彛)라는 19살 나이의 학생이 일찍이 관원들을 따라 유럽에 다녀왔다. 그는 1866년에  <항해술기(航海述奇)>를 쓰며, 외국 선박에 설치된 수세식 변기를 상세히 묘사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깨끗한 물통이 있고, 뚜껑을 열면 아래에 도자기 그릇이 있다. 그릇 아래에는 물과 연결된 구멍이 있으며, 좌우에는 각각 손잡이 고리가 하나씩 있다. 용변을 마친 후 왼쪽 손잡이를 당기면 물이 아래에서 그릇과 통을 씻어주고, 이어서 오른쪽 손잡이를 당기면 오물이 물을 따라 아래로 흘러 내려간다.” 

타이완에서도 20세기 초에 이미 수세식 변기를 사용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문헌에서 타이완의 수세식 변기의 존재가 확인된 시점은 다이쇼와 쇼와 시기가 교차하던  1920년대 후반이다. 총독부의 토목기사 이데 가오루(井手薰) 등이 조직한 ‘대만건축회’는 1929년(쇼와 4년 3월)부터 <대만건축회지>를 간행하여 많은 주요 신축 건물의 시공 기록을 게재하였다. 그 중 타이베이시 교마치(京町, 지금의 보아이루博愛路 일대)에 위치한 곤도상회(近藤商會)*의 신축 건물이 포함되어 있다. 이 건물은 다이쇼 15년(1926년) 10월에 착공하여 쇼와 2년(1927년)에 완공되었으며, 화장실은 수세식으로 설계되었고, 건물 외부에 정화조가 설치되었다. 3층 높이의 곤도상회는 1층 상점에 유리 진열창이 설치되고, 대리석으로 마감된 매우 세련된 건물이었다. 여기에 설치된 수세식 화장실은 일제시기 타이완에서 가장 현대적인 화장실 형태로 평가된다. 

   *곤도상회의 위치는 현재의 타이베이시 보아이루 93호(博愛路93號)이다.

한편, 곤도상회가 완공되고 2년 후 지어진 고등법원 장관 관저의 화장실은 일본 내무성이 직접 연구 개발한 ‘내무성식’ 양식만을 채택해 설치되었다. 내무성식 화장실은 배설물이 곧바로 지하에 있는 분뇨 저장조로 내려가며, 총 5개의 저장조에서 자연 발효된 후 최종적으로는 인력을 통해 배출되었다. 이는 수세식 화장실처럼 배설물이 하수도로 직접 흘러가 정화조로 보내지는 방식과는 달랐다. 

쇼와 시기 이러한 내무성식 변소 제조비는 80엔으로 보통 직장인의 월급의 약 4배에 해당했다. 오늘날 월급이 4만 타이완뉴달러라고 환산하면 약 10여만 타이완뉴달러 이상의 비용이 필요한 수준이다. 고등법원 원장과 같은 고위직이 이러한 ‘내무성식’ 화장실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내무성식 화장실은 매우 고급 건축 설비였음을 알 수 있다.

타이완을 전체적으로 보면, 일제 말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도자기로 된 흰색 좌식 변기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으나, 수량은 여전히 적었으며, 물을 내리는 변기는 더욱 희귀했다. 

일제시기 루이팡 탄광업계의 거물인 리젠싱(李建興, 1891-1981)을 기념하기 위한 자리에서 이러한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타이완성 주석을 지낸 우궈전(吳國楨)의 형 우궈빙(吳國炳)이 회상하기를, 과거 리젠싱과 유럽에 있었을 때 파리와 런던이 향기롭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유는 향수를 팔기 때문이다. 홍콩 역시 향기로웠는데, 이는 무도회에서 여인들이 향수를 뿌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타이완에 오자 ‘타이완은 악취가 가득한 것 같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집집마다 오물 구덩이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우궈빙은 수세식 변기를 설치하면 악취가 사라질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지식을 전파하고 실물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후 리젠싱이 우궈빙에게 “정말 효과가 있다. 나도 집에 수세식 변기를 설치해야겠다”고 답했다고… 

그 이후로 리젠싱이 실제 수세식 변기를 설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2차세계대전 후에도 타이완에서는 부유한 사업가조차 집에 수세식 변기를 설치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陳柔縉, 台灣西洋文明的初體驗, 麥田, 2011.

 

서승임 徐承任 ([email protected])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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