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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과 구정을 모두 쇠는 설 문화의 시작

  • 2024.12.31
대만주간신보
1937년 발행된 근하신년 축하 카드 - 사진: PAN-LUNG PHILATELIC

‘신정’과 ‘구정’을 모두 쇠는 설 문화의 시작

“5, 4, 3, 2, 1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한 해의 마지막 날 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올 한 해를 넘기고 새해를 맞이합니다. 이렇게 1월 1일 신정이 지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설 맛’이 가득한 음식과 세뱃돈 등이 음력 설인 구정에 등장합니다. 두 번째 새해입니다, 현재 타이완은 이미 1월 1일 신정과 구정 이렇게 두 차례에 거쳐 설을 쇠는 데 매우 익숙합니다. 한국도 그렇죠. 하지만 100년 전에도 그랬을까요? 타이완 사람들은 언제부터 신년 설을 쇠기 시작했을까요?

일제시대는 모든 변화의 시작이었죠. 청나라 말기부터 일제시기까지 타이완 사람들은 전통적인 음력 설만 지내는 문화에서 점차 서력의 1월 1일도 기념하는 두 번의 새해맞이 문화로 바뀌어갔습니다. 중앙연구원 타이완사연구소의 린위루(林玉茹) 연구원은 타이완의 설 문화의 변화에 대해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하여 타이완 사람들이 전통적인 음력 설 문화를 통해 어떻게 일본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고 또 타협해 갔는지 설명합니다. (1890-1918년은 구력 신정의 지속과 변용, 1896-1918년은 서력 신정의 도입, 1919-1936년은 두 번의 새해맞이 문화 정착과 불완전 동화, 1937-1945년은 황민화 정책에 대한 구력 신년의 저항) 

과거 타이완 사람들은 어떻게 설을 보냈을까요?

타이중 펑위안에 살았던 지식인, 장리쥔(張麗俊)이 기록한 일기를 보면, 1900년대 초, 집집마다 전통적인 음력 설을 축하하고 각종 전통 의식으로 새해를 맞이하며 떠들썩하게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청나라 말 이후 일제시기 초기까지 많은 타이완 사람들의 일반적인 새해 문화는 바로 구정 설이었죠.  

1895년, 일본이 타이완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근대화의 상징인 서력, 즉 양력이 도입됐다. 1909년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음력 문화를 폐지하였으나, 타이완 사람들을 회유하기 위해 그들이 구정 설을 쇠는 것은 허용했죠. 하지만 학교 및 관공서에서는 점차 신년 설을 쇠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타이완 민중문화는 쉽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보정(오늘날의 마을 이장)을 지낸 장리준은 전통 한학 교육을 받은 인물로, 그의 일기를 보면 그는 음력 위주로 설을 쇠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1918년 이전, 타이완 사람들에게는 일본에서 도입한 양력을 기준으로 한 신정 설은 보편화되지 않았음을 이야기합니다.

신정에 일제시기 타이완 사람들은…: 봄술, 나들이, 명함교환회

달력은 일본 정부의 동화정책에 첫걸음으로 간주됩니다. 일부 타이완 사람들은 신정 설에 대나무나 소나무로 만든 일본 전통 장식인 카도마츠(門松), 일본국기, 지푸라기 등을 걸어 일본식으로 신정을 보내는 데 “협력만” 했죠.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구정 설 전통을 따랐습니다. 장리준도  1916년 1월 1일 신정에 춘련을 붙이는 시도를 처음하고는 자신의 일기에 “그저 이야기에 대응할 따름”이라고 적었죠. 

그러다 1910년대 말에 이르러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1919년 덴 켄지로(田健治郞) 총독이 취임하자 내륙 연장주의를 채택해 적극적인 동화 조치를 취했습니다. 도시의 상점들은 신정에 휴업하고 중상류층, 지식인들은 점차 신정 설에  일본이 들여온 설날 행사에 참여하는 등 신정과 구정의 요소가 섞인 설날문화가 대도시를 중심으로 성행하기 시작했죠.

예를 들어 장리쥔은 타이완 사람들이 주최하는 ‘봄술(春酒)’ 행사에 자주 참석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봄 술’ 행사는 신넨카이(新年會), 즉 신년회와 같은 모임을 말합니다. 1930년대에는 타이완의 민족운동 지도자 린셴탕(林献堂)도 종종 ‘망년회’ 행사에 참석했죠. 망년회와 신년회 행사에서 벌어지는 '명함 교환회'의 규모는 계속 확대되어 수백 명에서 천 명 이상으로 증가하기까지 했습니다. 이후 수많은 여성단체들도 가입하고 여성들 간 명함 교환회까지 생겨나면서 신년행사도 남녀성별의 벽을 허물게 되었죠.

린셴탕의 일기는 당시 타이완 상류층의 명절 생활을 반영하는데, 그의 일기를 통해 어떻게 구정에서 구정과 신정을 모두 쇠는 문화로 바뀌어 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린 씨 집안은 1929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신정을 기념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신년 축하 인사를 하고 공학교의 축하식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가족들이 둥글게 모여 식사를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웨이루(圍爐) 등 전통적인 행사는 구정에 여전히 행하고 있었습니다. 

린 씨 일기에서 알 수 있다시피, 1920년대 이후 대도시의 중상류층 타이완 사람들은 이렇게 신정과 구정 '두 번의 설맞이'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시기, 구정은 ‘엄금’

그러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쟁의 규모가 커지자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신임 총독 고바야시 세이조(小林磯造)는 황민화운동을 통해 타이완 사람을 '일본인'으로 개조하려 적극적으로 시도했죠. 그 정책 중 하나가 음력 설을 쇠는 문화를 엄격히 금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대신 음력 설에 '근로보국주간'을 실시하여 노동자들에게 계속 출근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당국의 이러한 강압적인 정책에도 불구하고 타이완의 구정 설 문화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구정 설 전후 도살된 돼지의 양을 통해 확인이 가능한데, 1938년 장화(彰化)에서 450마리의 돼지를 도살했고 이는 전년도에 비해서는 감소했지만 평소에 도축되는 양(약 50마리)에 비하면 훨씬 높았죠. 이를 통해 타이완 사람들은 당국의 감시를 피해 여전히 몰래 구정 설을 쇠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찰과 무력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 구정의 폐기는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둔 것은 사실입니다. 일제 말기에 일부 도시 청년들은 음력 설을 쇠긴 하지만, 신정에 신사를 참배하고 놀이공원에 가야 진짜 신년을 맞이한다는 것처럼 느꼈고, 한동안 폭죽과 춘련도 구정 설에 자취를 감추었죠. 그럼에도 타이난에 거주했던 의사 우신룽(吳新榮)이 구정 설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친구 집에 들러, "3층에 있는 작은 다락방에서 두, 세 시간을 절제하며 보냈다"고 말했고, 린셴탕 집안은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구정 설에 몰래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며 보냈다고 했다시피, 많은 타이완 사람들은 자신의 집에서 몰래 구정 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도시는 신정을 받아들이고, 농촌은 구정을 지키다

북부 도시와 중남부 농촌의 설 풍경은 점점 달라져갔습니다. 타이베이를 포함해 일본 식민정부와 가까이 있는 북부 도시들은 신사를 참배하고 떡을 먹으며 일본인과 같이 도소주(屠蘇酒)를 마시며 단체로 절을 하는 등 설 문화가 점차 일본 ‘내지화’ 되어갔습니다. 북부 도시의 상가들은 신정과 함께 휴업하고, 회사원이나 교직원 등도 일본식 설 문화를 가장 먼저 수용하였죠. 백화점에서는 연말 복권행사가 열리고 새해가 다가오면 일본 국기 게양식을 했던 일제시기 문화는 그 때부터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일본식 새해 문화입니다. 

이 중 대중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일본식 새해 문화로 린위루 연구원은 ‘외출하는 습관’을 꼽았습니다. 1월 1일 신정은 당시 방학이었던지라 학부모들은 자녀들을 공원, 놀이공원, 동물원으로 데려가고, 각종 향우회, 부녀회, 동창회도 방학을 맞아 모임을 가졌습니다. 마치 오늘날 신년 연휴에 가족 여행이나 해외 출국이 유행하고 있는 것과 유사하죠.

그러나 중남부의 농촌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구정 설을 보내는 문화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농어촌은 서력, 즉 양력이 아닌 구력인 음력에 따라 자신들의 업을 이어갔고, 동시대의 도시 사람들처럼 별다른 신년 의식을 보내지 않으며 옛날 방식대로 살아가는 태도를 유지하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정 설은 왜 보존되었을까? 명절을 보내고, 가족을 만나고,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는 등의 의식은 의미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이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 새로운 해를 맞이할 때마다 신정과 구정을 모두 쇠는 문화가 익숙한 요즘. 신정은 이미 양력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한 해가 흐르고 새로운 해가 왔음을 직관적으로 알려주는 차원에서, 구정은 가족들이 함께 모여 음식과 이야기를 나누는 정겨운 문화로서 모두 우리 곁에 남아있습니다.

 

     ►참고문헌

       林玉茹,〈過新年:從傳統到現代臺灣節慶生活的交錯與嫁接〉 《臺灣史研究》第 21 卷 1 期,頁 1-43,2014.

 

서승임 徐承任 ([email protected])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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