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타이완의 소리 RTI공식 앱 내려받기
열기
:::

일제시기에는 시험지가 감옥에서 인쇄되었다고?!

  • 2024.12.17

학교에서 입학생을 선발하기 위해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치르는 시험인 ‘입시’. 한국에는 날씨가 쌀쌀해지는 11월 중순, 타이완에서는 1월 하순과 7월 중순 두 번에 걸쳐 대학 입시를 치루죠. ‘입시’라는 용어가 요즘에는 대학 입학을 위한 시험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100여 년 전인 일제시기, 입시는 초등교육을 마친 학생들이 중등교육기관으로 진학하기 위해 치르는 시험을 일컬었습니다. 오늘날 대학 입시가 말그대로 전쟁을 방불케하듯, 일제시기 입시도 치열한 경쟁률을 자랑하며, 입시 관련해서 다양한 사건사고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오늘 <대만주간신보> 시간에서는 일제시기 입시와 관련된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중학교 시험이 곧 '입시'

오늘날 타이완은 15세에 고등학교 입학을 위한 시험을 보고, 18세에 대학 입시를 보는 반면, 일제시기에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13세 학생들이 치루는 시험이 가장 중요한 ‘입시’였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를 진학하는 것이 필수인 요즘에는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일제시기 타이완에서 중학교는 난이도 있는 시험을 봐서 통과된 사람만이 진학할 수 있는, 문턱이 꽤 높은 학교였죠. 그렇게 시험을 치뤄 중학교에 들어가면 5년 동안 공부를 했습니다. 지금과 같이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3학년으로 나누지 않고 중학교 과정을 5년 간 이어가죠. 만약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높은 학교에 진학하려면, 중학교 졸업 후 타이베이 의과대학에 가거나 혹은 중학교 4학년 때 타이베이 고등학교란 곳으로 전학을 가 타이베이 제국대학 진학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제국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은 손에 꼽을 만큼 극소수였죠. 그랬기에, 가장 경쟁률이 심한 입시가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진학하는 중학교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일제시기 중학교 입시를 치르는 시기는 학기말인 3월 하순이었습니다. 4월에 첫 학기가 시작하는 일본식 교육제도 하에서 3월 하순이 학기 말이었던 것이죠. 시험을 치룬 후 점수가 나오면 우리는 흔히 ‘몇 점을 맞았다’라고 이야기 하는데, 이 때 ‘점(點)’이란 단위는 일본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일제시기 타이완에서도 시험 점수를 이야기할 때 중국어인 ‘지 펀(幾分)’이라고 하지 않고 ‘점’이란 단위를 사용했죠. 

타이완 전국의 각 중학교는 학교 별로 입시 시험을 별도로 준비해 개별 모집을 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같은 동네의 여러 학교가 함께 연합하여 일종의 연합 시험을 보게하기도 했습니다만, 유명한 중학교들은 대부분 각자 시험지를 준비해 시험을 치르게 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중학교 및 그 이상 학교 진학을 위한 입시 시험지를 감옥에서 인쇄했다는 사실인데요! 오늘날 대학 입시를 위한 시험지는 유출 금지를 위해 입시출제자와 인쇄관련 전문가들을 며칠 간 한 장소에 가두어 놓고 시험지를 만들고 인쇄한다고 하죠. 일제시기에서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감옥이 시험지 인쇄를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감옥에서 입시 시험지를 인쇄했다라… 사실 일제시기 감옥은 죄인을 구금하는 장소 외에도 시험지를 인쇄하고 심지어는 장사를 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재소자들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기와를 만들고, 짚을 짜거나, 양복을 꿰매고, 수작업으로 의자 등 공예품 등을 만들었고, 이것들을 상품으로 팔기도 했다죠. 사방이 높은 벽으로 이루어져 있는 감옥은 시험지 유출을 방지할 수 있는 폐쇄성을 갖춘 장소였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대외적으로 상품을 판매할 수 있었을 정도로 감옥 안의 것을 외부로 노출 시키는 ‘틈’을 갖고 있기도 했습니다.    

시험지 유출 사건

타이완 중부 장화(彰化) 허메이(和美)에는 리 씨 성을 가진 경찰이 있었는데,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타이중 감옥에 갇힌 채 옥중에서 인쇄노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타이중 감옥에서 시험지를 인쇄하는 일을 하던 그는 외부의 사람과 짜고는 한 사람의 명의로 감옥에 편지지 열 장을 주문해 여기에 사범학교 시험지를 몰래 싸서 가지고 나갔습니다. 시험 날짜가 너무 임박했던지라 자신이 갖고 나온 시험지를 살 사람을 찾지 못해 그의 계략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만, 적어도 감옥에서 시험지를 빼돌리는 데 성공한 경험을 갖게 되었죠. 

1938년, 전 경찰 리 씨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이 수법을 다시 적용합니다. ‘대갑모(大甲某)’라는 의사 이름으로 감옥에 약봉지를 주문했고, 주문한 약봉지에 한 중학교 입학 시험지를 넣고 밖으로 유출시켜 십여 명의 사람들에게 팔았습니다. 시험 이튿날이 되어서야 경찰은 소문을 듣고 조사를 벌이기 시작해 한 달 여가 동안 사건의 경위를 밝히고는 신문을 통해 이 사건을 외부에 공개했습니다. 

3년 후인 1941년, 입시 시험지를 갖고 리 씨보다 더 크게 노는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이번에는 타이완 남부 가오슝인데요. 가오슝 치산(旗山) 지역에 사는 32세 린 씨는 일명 ‘의과대학 보증반’을 조직해 타이베이 교도소 인쇄 부서의 재소자 세 명과 교도소 직원 한 명과 공모하여 타이베이 제국대학 의학부의 시험지를 훔쳤습니다. 그리고는 의학 박사의 동생을 끌어들여 타이베이, 신주, 타이중 등 타이완 각지에 사는 12명의 수험생과 학부모를 낚아 한 사람당 2천 엔이라는 엄청난 금액의 사례금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죠. 

2천 엔은 당시 공무원의 무려 4년치 월급에 준합니다. 의과대학 수험생의 학부모는 자신의 자녀가 의과대에 합격할 수만 있다면 이런 거금을 투자하는 데에는 망설임이 없었죠. 일제시기 타이완의 최고 수입을 자랑하는 직업인 의사가 된다면 그가 얻을 이익은 그 이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금을 투자한 학부모에게는 유감이지만, 이 사건은 다행히 시험 전에 수사가 진행되어 연루된 학생들은 시험을 치룰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입시 관련 에피소드

입시 시험지가 감옥에서 유출되는 일 외에도 여러 사건사고가 빈번했습니다. 때는 1934년 타이난, 타이난제1중학교의 신입생 모집 입학시험이 있던 3월입니다. 3월 27일과 28일 이틀에 걸쳐 입학시험이 거행될 예정이었고, 시험 사흘 전인 24일 오전 시험지 원고는 인쇄를 위해 타이난 교도소에 송부되었습니다. 시험 전, 일본어 과목 문제를 출제한 선생님이 문제 교정을 위해 교도소로 가서는 길에서 원고를 잃어버리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학교 관계자는 물론 지역 경찰까지 동원되어 그 원고를 찾아보려 했으나 실패했죠. 선생님이 잃어버린 원고에는 ‘입시 시험지’라든지 ‘입시 문제’라는 용어가 적혀 있지는 않았지만, 타이난제1중학교의 로고가 있어 해당 학교의 시험지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결국, 교장은 고민 끝에 일어 선생님이 교정한 문제를 긴급히 바꾸기로 결정하고 말았습니다.   

이듬해에는 타이베이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학생을 위한 중학교인 타이베이제2고등여학교 입학시험 중 발생했는데요. 시험 중 수학 과목에는 1번 단순 계산문제와 응용문제 5문제를 포함해 총 6문제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단순 계산문제인 만큼 가장 단순해야 하죠. 그런데 문제에 원래 있어야 할 더하기 부호(+) 대신 빼기 부호(-)로 잘못 입력된 바람에 정답이 ‘마이너스 8’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제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아직 마이너스 개념이 없었다는 것이죠. 그러자 400여 명의 어린 수험생들은 모두 난감해하며 문제를 풀어나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한 수험생이 용감하게 질문을 던졌고, 그제서야 시험 감독 선생님은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신문은 이 사건에 상당히 엄중하게 제목을 달고는 “타이완 교육계에 전례가 없는 중대한 문제"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이 첫번째 문제에서 막혀 나머지 응용문제를 푸는 데 까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안 여러 학부모들은 적극적으로 항의하며 자신의 딸이 만약 학교에서 떨어진다면 재시험을 요구할 것이라고 외치기도 했죠. 사후에 후속 보도가 없어, 순조롭게 마무리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만, 이 사건을 통해 당시에도 자녀의 입시에는 적지 않은 학부모들이 눈에 불을 켜고 예리하게 주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제시기에도 타이완 학부모들은 자녀들의 중학교 입시에 열성적이었습니다. 학교 입시 시험을 보는 날이면 시험장 밖에 아이를 기다리는 절실한 학부모들을 도처에 쉽게 발견할 수 있었죠. 당시 타이완 사회에서 중학교라는 학력은 지금의 대학에 준하는 높은 학력에 속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안에서도 명문과 비명문이 구분되어 있어,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라면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을 바꿔서라도 명문 중학교에 진학하고자 입시 시험을 보았죠. 중학교가 상징하는 고학력은 당시 타이완 사회 인구 중 1% 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었을 만큼 자리도 적고, 문턱은 높았습니다. 그러니 중학교 입시 경쟁이 치열해질 수 밖에요.  

다사다난한 중학교(혹은 고등여학교)의 입시 시험이 끝나고 합격자 명단을 발표하는 날이 왔습니다. 당시에는 각 학교가 합격자 명단을 제시하기 전날 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미 합격생들을 호명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호명된 학생과 학부모는 기쁜마음으로 온 집안 식구들과 환호하며 중학교 개학준비를 했고요.   

100년 전이나 오늘날이나 ‘입시’가 가진 높은 경쟁률, 그리고 이에 합격했을 시 학생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동참해 기뻐해주는 문화는 여전한 것 같습니다. 

 

원고/서승임 徐承任 ([email protected]

진행/손전홍

 

프로그램 진행자

관련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