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목요일, 4월 4일은 타이완의 어린이날입니다. 이곳의 어린이날은 타이완의 최대명절 중 하나인 청명절과 날짜가 겹쳐, 4월 첫째주는 춘절(春節)만큼은 아니지만 꽤 길게 쉴 수 있는 연휴이기도 합니다. 올해에도 어린이날인 4일을 시작으로 청명절 연휴인 7일까지 나흘간의 연휴가 있어 부모님도, 어린이들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요즘 어린아이들이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유치원 가는 건 예사가 되었죠. 유치원이 보편화되면서 오히려 유치원도 계급화가 되고 있는 요즘입니다. 소위 ‘영어유치원’이라 해서 초등학교 진학 전 영어로만 수업을 하는 유치원으로 아이를 보내 ‘바이링구얼(혹은 멀티링구얼)’이 대세인 요즘 글로벌 시대의 추세를 따라잡기 위한 움직임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3대만 위로 거슬러 올라가도 유치원 자체를 아무나 다닐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 대만주간신보 시간에는 타이완의 어린이날을 맞아 타이완의 유치원 역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1950년대 타이베이 시장을 역임한 바 있는 우싼리엔(吳三連, 1899-1988)은 일제시기 타이난의 한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농사지을 밭이 없던 그의 가정은 아버지와 형은 밖으로 나가 목수 일을 해야 했고, 어머니는 매일 마을 밖으로 돼지를 몰아내는 일을 했었죠. 우씨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집에 홀로 남겨진 나는 고아나 다름없었다.” 라고 적었을 만큼 어린 우싼리엔은 집에 혼자 남겨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점심은 꼬챙이에 끼운 고구마를 마침 점심을 만들고 있는 이웃집에 부탁해 겸사겸사 구워먹으며 허기를 채웠고, 고구마가 없으면 오후 내내 굶을 수 밖에 없었다.”고 회상합니다. 하루 세 끼를 챙겨먹는 것 조차 사치였던 당시 우씨의 어린시절에 공부를 한다는 건 정말 하늘의 별따기와 같았죠.
반면, 가정 형편이 좀 나은 어린이의 경우 초등학교 취학 전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자이 출신이자 전 타이베이 시민정 국장을 역임한 커타이산(柯台山, 1914-?)의 집안은 꽤 부유했습니다. 아버지는 성실한 독농가셨죠. 그가 다섯 살 때 어머니는 그에게 로마자를 가르쳐 그는 어려서부터 성경책을 읽을 수 있었고, 아버지는 그에게 ‘삼자경(三字經)'이나 ‘천자문' 등을 가르쳤습니다. 과거 사법원장을 역임한 린양강(林洋港, 1927-2013)도 네 살 무렵부터 ‘삼자경'을 외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의 삼촌이 고향의 한 서당에서 한문을 가르친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하루는 한 점쟁이가 린 씨 집에 찾아와 ‘장원에 급제할 인물'이라고 예언하자, 그의 집안 식구들은 린양강을 서당으로 보내 ‘논어'나 ‘맹자' 등의 가르침도 일찌감치 배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커타이산이나 린양강의 경험은 일제시기 타이완에서는 극소수의 사례에 불과하죠.
오늘날 90세 이상의 어르신들, 즉 일제시기 때 어린시절을 겪으신 타이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어린 시절 최소한의 초등교육(당시 공학교나 소학교)을 받았다면, 대부분 7살 학교에 입학한 시기부터 회상하실 겁니다. 그 이전의 교육은 거의 공백에 가깝죠. 오히려 냇가에서 물놀이를 하거나 나비를 잡으러 돌아다니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렇듯 당시 상황에서 ‘유치원'은 매우 선진적인 교육제도였을 뿐만 아니라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만이 받을 수 있는 희소한 교육 제도이자 상품이었습니다.
타이완의 대표적인 사학자 린헝다오(林衡道, 1915-1997)는 타이완의 대표적인 부호가문인 반차오 린가(板橋林家) 출신으로, 그는 4살 무렵부터 강제로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선생님을 모셔와 아들의 공부를 부탁했고, 심지어 두 달 간 유치원을 다닌 경험도 있었습니다.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의 고향인 중국 푸저우(福州) 어린시절을 보내며 유치원을 다녔는데, 자신이 유치원을 다녔던 기억을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당시 푸저우(福州)에서는 유행하는 일이었는데…....할머니가 나를 도와 양복을 맞추고 유모가 인력거를 타고 학교에 가라고 안아주셨는데, 차가 양차오 항(楊橋巷)에서 나와 골목길을 돌 때, 경찰이 내가 양복을 입은 것을 보고 경례를 한 기억이 있다.”
타이완에는 일제시기 초기부터 유치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타이완 교육사에서 말하듯 타이완에서 학교와 같은 근대 교육 제도는 대부분 외국인에 의해 창설되었죠. 학교의 경우 일본 총독부나 기독교 선교사 등에 의해 시작되었는데요. 유치원 교육이란 개념도 일본을 통해 타이완으로 유입되었지만, 타이완의 첫 유치원은 일본인이 아닌 타이완인이 스스로 설립했다는 놀라운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타이완의 최초 유치원을 설립한 사람은 차이멍슝(蔡夢雄)으로, 일본인이 쓴 <대만교육연혁지(臺灣教育沿革誌)>(1939년 출판)에서는 차이 씨가 타이완의 유치원을 처음으로 설립한 사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대만교육회'라는 교육 단체의 간사였던 차이멍슝은 일찍이 일본 교토와 오사카에 관광을 가서 일본 내 유치원의 교육 활동을 보고 찬사를 보내며 타이완으로 돌아와 유치원 창설에 대한 의지를 고취시킵니다. 일본이 타이완을 식민 통치한지 3년째가 되던 해인 1897년 10월 18일, 타이난 신학자들이 조직한 ‘타이난 교육회'를 통해 타이난 현 지사에게 유치원 설립을 제안했고, 통과되어 같은 해 12월 1일에 타이완의 첫 유치원이 개웠습니다.
유치원을 설립한 차이멍슝은 당시 겨우 서른 살에 불과했고, 재산은 약 20만 엔으로 당시 지방의 부호에 비해서는 많은 재산을 가졌으나, 타이베이 최고의 차 상인이었던 리춘성에 비해서는 턱 없이 모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이 공생(貢生)으로 벼슬을 얻은 바 있었으며, 차이 본인도 청나라 시기 ‘늠생(廩生)’으로 수재였습니다. 청나라에서 일본 식민 통치로 정권이 바뀌자 그는 관직을 맡아 타이난 현에서 ‘참사(參事)’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총독부는 타이완 통치 초기 행정 기관 설치를 위해 덕망을 갖춘 타이완인을 관리로 채용해 정부와 타이완인 사이의 원활한 소통을 꾀했습니다. 타이완 전체를 6현 3청으로 일괄 조정한 1897년 각 현과 청 내에 고문 성격의 ‘참사’를 두어 총독의 일을 돕는 관직을 주었는데, 이 첫 해에 차이멍슝은 타이난현 참사로 임명된 것입니다. 당시 타이완에는 총 15명의 참사가 있었는데 이 중 차이 씨는 가장 젊은 참사였습니다.
1897년 12월 1일 타이완 역사상 최초의 유치원이 타이난의 관제묘(關帝廟)에서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유치원에는 타이완인 4명과 일본인 1명의 창립위원이 있었고, 차이멍슝은 유치원 원장을 역임했습니다. 당시 여자 사범학교를 졸업한 일본 여성 두 명을 일명 ‘보모(保姆)’, 즉 유치원 교사로 채용했죠. 설립 당시 학생은 총 20명으로 여아가 3분의 1, 남아가 3분의 2였습니다. 모두 차이멍슝과 같은 타이난현 참사와 부호 가문의 자제들이었습니다. 타이완 최초의 유치원은 이렇게 일제시대 타이난 상류층의 색채를 강하게 띄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개원한지 3년이 채 안 된 1900년 10월 유치원은 문을 닫았습니다. 유치원 개원 후 타이완 아이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 일본인 아이들이었습니다. <대만교육연혁지>에 따르면, 학식과 경험이 없는 (타이완) 본도인이 원장을 맡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 유명인 명부에 따르면 유치원 원장을 맡았던 차이멍슝은 1900년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유치원은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중추인력을 상실해 문을 닫아야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타이완 최초의 유치원인 타이난 관제묘 유치원이 사라진 뒤 타이완에는 다른 지역에서 종종 유치원이 설립되긴 하였으나, 1917년까지 섬 전체 유치원 숫자는 한 자릿수를 넘어서지 못했고, 한 해 동안 267명밖에 안되는 타이완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녔다고 알려져있습니다.
타이완 외교관을 역임한 장차오잉(張超英, 1933-2007)씨는 부유한 상인 가정 출신으로, 그의 기억에 따르면 유치원은 의무교육이 아니어서 학비를 지불해야 했고, 자신이 다니던 다다오청(大稻埕) 유치원은 타이베이 에라쿠초(永樂町)에 있었는데, 중산베이루(中山北路)에 있던 집과는 거리가 좀 있어서 매일 인력거가 데려다 주었다고 합니다. 확실히 일제시기 타이완의 유치원은 여전히 귀족적인 색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 없습니다.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상류층의 자제들만 다닐 수 있었던 유치원이 이제는 대중화, 보편화가 되어 모든 아이들이 진학해야하는 첫 교육기관이 되었습니다.
►참고문헌
陳柔縉。《臺灣西方文明初體驗》。 臺北市: 麥田, 2011。
서승임 徐承任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