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에 기반한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아픔을 다룬 영화, ‘파묘’가 한국은 물론 타이완에서도 큰 흥행을 거두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3월 18일 기준 관객 900만 명을 돌파해 2024년 올해 최고 흥행작으로 등극했습니다. 개봉 첫날부터 33만 관객을 돌파해 직전에 개봉한 ‘서울의 봄'의 첫날 관객 10만명보다 무려 3배 이상 많은 수치를 기록했죠.
영화 파묘는 한국 뿐만 아니라 타이완을 비롯해 몽고, 인도네시아, 호주, 싱가포르와 북미, 영국 등 133개국에서도 개봉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현재까지 130만 관객이 관람해 역대 한국영화 중 관객 수 1위를 기록했고, 타이완에서는 3월 8일 개봉한 이후 지난 주말 기준 타이완 박스오피스 총 매표액 3천만 뉴타이완달러(한화 약 12억 6,450만 원)를 돌파했습니다. 타이완 관객들은 ‘최근 본 영화 중 최고의 영화'다, ‘두 번, 세 번 보고 싶다', ‘다가오는 청명절(清明節)에 조상님께 제사를 잘 드려야겠다', ‘어떤 풍습은 타이완과 유사해서 더 재미있었다.’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영화 파묘의 인기를 분석한 타이완의 한 기사에 따르면, 증거가 부족하거나 근거없이 상상한 초자연적인 힘에 의한 공포감이 아닌 구체적인 체계를 가진 풍수학에 기반을 둔 점, 한국의 전통 샤머니즘인 무당의 의식을 모티브로 오컬트라는 장르물에 한국 현지 문화를 잘 녹여낸 점, 그리고 역사성을 가진 스토리 잘 혼합했다는 점을 꼽았습니다.
영화 파묘의 기저에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한국의 태백산맥에 몰래 말뚝을 꽂아 풍수이론에서 호랑이처럼 생긴 한반도의 허리를 잘라내 국운을 쇠락시켰다는 일면 ‘쇠말뚝설’이 있습니다. 당시 중요한 독립운동가인 김상덕, 이화림, 윤봉길, 고영근의 이름을 가진 영화 속 캐릭터들이 무덤을 파냄으로 영화는 한국 사람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자리잡고 있는 식민지의 독을 뿌리째 뽑겠다는 열망과 기대에 부합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가 끝난 이후에도 쇠말뚝설이 하나의 전설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게다가 문민정부 시기인 1995년 2월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쇠말뚝 뽑기를 국가정책으로 실시해 118개의 말뚝을 뽑아낸 바 있는데요. 그러나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쇠말뚝이 박힌 위치는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에서 사용된 삼각점일 확률이 높으며, 조선총독부가 남긴 기록에도 한반도의 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곳곳에 박았다는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 한국 각지에서는 꼭 일제가 아니더라도 그 지방의 기를 풍수적으로 꺾어서 큰 인물이 나지 못하게 막았다거나 기세를 눌렀다는 등의 전설이 두루 존재했는데, 쇠말뚝설은 말뚝을 박는 주체가 일제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일제의 또 다른 식민지였던 타이완에서도 한국과 같은 ‘쇠말뚝설’이 있을까요? 유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타이완의 맥을 잡기 위해 각지에 신사를 지었는데, 당시 타이완 최고의 신사였던 ‘타이완신궁(臺灣神宮, 현 원산대반점 자리)을 타이완 최고의 명당 자리에 세워 타이완 통치를 더욱 공공히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타이완 민속학자들은 타이완에도 예전부터 선산에 나무못이나 쇠말뚝을 박으면 그 가문이 ‘아들을 낫지 못한다'거나 후대의 남자들이 활로를 찾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타이완에는 산 속 쇠말뚝 말고 타이완을 대표하는 아리산에 산 능선을 따라 일제가 철도를 건설한 역사가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역사 중 하나입니다.
아리산 철도는 타이완 총독부가 삼림 개발을 목적으로 목재 운반의 편의를 돕고자 설치한 철로입니다. 메이지 36년(1903) 본격적으로 탐색을 시작해, 9년 뒤인 다이쇼 원년(1912)에 66.6km에 걸치는 철도레일이 정식 완공, 개통되었죠. 일제의 타이완 삼림개발사업은 꾸준히 확장해 지선철로를 증설해 현재까지 남았는 아리산 철도의 길이는 71.6km에 달합니다.
일제시기 타이완에는 박물학자, 인류학자, 민속학자 등 자원조사나 탐사를 위한 전문가들이 들어와 타이완의 지형과 삼림을 연구했는데, 아리산 철도와 깊은 관계가 있는 사람은 삼림학자 가와이 시타로(河合鈰太郎, 1865-1931) 박사입니다. 그는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민정장관의 초청을 받아 타이완 아리산 탐사에 나섰고, 아리산에 풍부한 산림자원이 잠재력이 있다고 보고는 개발 편의를 위해 타이완 총독부에 아리산 철도를 제안한 첫 인물입니다. 아리산 철도 건설은 가와이 시타로 박사의 구상이었던 것이죠.
1865년생 나고야 출신인 가와이 박사는 도쿄제국대학 임업에 관한 이론과 운영 방법을 연구하는 임학과를 졸업하고 유럽에서 유학한 수재였습니다. 타이완 총독부의 기용으로 아리산 철로 건설을 제안 했으나, 공사난과 높은 비용 때문에 일본 정부는 거부했었죠. 이후 가와이 박사는 민간회사인 후지타(藤田)팀과 공동개발을 추진하다가 공사난으로 경비를 충당해야하는 우여곡절 겪다 끝내 포기했고, 노선의 절반만 완성한 채 그는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이후 총독부는 산림 개발을 관영으로 인수해 다이쇼 원년(1912) 12월에 아리산의 이만평에 이르는 철로 전 구간을 개통했습니다. 아리산 철도의 완성으로 일본 정부가 주도하는 임업은 상당히 발전했습니다. 임업이 발달했다는 것은 곧 아리산의 수많은 산림자원의 개발과 약탈을 의미했습니다. 오늘날에 타이완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타이완의 산에서 홍회나무(紅檜), 샤오난나무(肖楠), 편백나무 등 귀중한 나무를 많이 약탈했다'는 사실을 보편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에 현존하는 많은 신사의 건물을 견고하게 지탱하는 거대한 나무기둥 일부가 타이완에서 건너 간 귀중한 자원이라고도 하고요.
1912년 아리산 철도가 개통되고 7년 뒤인 1919년 가와이는 아리산으로 재차방문합니다. 이때 그가 본 아리산은 울창한 산림과 하늘을 찌를 듯한 고목은 많이 없어진 상태였다고 합니다. 7년 사이 이미 수많은 나무가 벌채되었던 것이죠. 가와이는 "도끼가 산속으로 들어가 천년의 고목림을 벌채하고, 침석과 이끼는 온데간데 없고, 샘 소리만이 옛 소리로 삼는다"(斧斤走入翠微岑,伐盡千年古木林,枕石席苔散無蹤,鳴泉當作舊時音)라는 시구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는 아리산 철도의 주창자였으나 막상 삼림이 파괴되는 광경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던 것이죠. 가와이의 탄식은 일제가 얼마나 많이 타이완의 산림자원을 무방비하게 채굴해갔는지를 말해줍니다.
한편, 철도 개통 이후 아리산은 당시 주요 여행 명소 중 하나가 되기도 했습니다. 타이완 내 많은 초등학교과 중학교에서는 아리산이나 그 옆 신고산(新高山)으로 수학여행을 갔습니다. 신고산은 ‘옥산’의 당시 이름으로 타이완의 최고봉에 해당하는 산입니다. 일본정신을 대표하는 후지산보다 훨씬 높은 옥산이 발견되자, 1897년 메이지 천황이 '신고산'이라고 하사하면서 이후 일제시기 내내 신고산이라고 불렸죠. 1920년대부터 타이완의 중고등학생뿐만 아니라 초등학생들도 산꼭대기를 등반하는 신고산 등반 문화가 붐을 이뤘고, 어떤 학교에서는 동아리를 구성하여 1년에 한 번씩 신고산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본토로 돌아가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지 얼마 안 된 1931년 가와이가 사망하자 타이완 자이 시역소와 자이출장소(嘉義出張所)는 자이 공당(嘉義公堂)에서 특별히 표창식을 열어 그의 공로에 감사를 표했다. 이후 아리산에 비석을 세운 것을 기념하여 1933년 비석 제막식을 거행하였는데, 당시 아리산 임업계의 주요인사 100여 명이 참석습니다. 가와이의 비석은 지금도 아리산 위 향림 신목 옆에 세워져 있습니다.
현재에도 아리산에는 아리산 철도를 처음 기획한 일본 삼림학자 가와이 시타로의 비석이 있다. - 사진: 위키피디아
아리산 임업과 철도는 중화민국 문화부에 의해 '국가 중요 문화경관'으로 등록되었고, '세계유산 잠재력'으로 평가되는 타이완의 주요 문화이자 역사가 되었습니다. 원래 목재를 벌채하고 운송하기 위해 건설된 삼림철도가 국가급 중요한 문화경관이 된 것은 그 안에서 보여준 공학기술이 험준한 산림지형을 극복하고 각종 창의성 조정과 결합하여 확실히 독특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요.
아리산과 삼림철도는 이제 서로 떼어낼 수 없는 하나의 문화경관이 되었습니다. 타이완인들도 자랑스러워하는 풍경 중 하나이죠. 다채로운 자연생태와 인문역사, 생물다양성을 갖고 있는 아리산에 여행을 가신다면 아름다운 풍경 외에도 치밀한 식민지 약탈 역사가 바로 이곳 아리산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리산 임업철로 및 문화자산관리처 https://afrch.forest.gov.tw/
서승임 徐承任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