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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타이완 베스트셀러 <사랑스런 원수>

  • 2024.02.06
대만주간신보
일제시기 식민지 타이완의 베스트셀러 '사랑스런 원수'는 1954년 8월에 가오슝에 있는 경방서국(慶芳書局)에서도 재판될 만큼 해방 후에도 인기를 끌었다. - 사진: 국립타이완역사박물관

일정기간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책을 일컫는 말인 베스트셀러는 한 시대의 대중들의 욕망, 기대, 목표 등을 읽어볼 수 있는 사회적인 지표 중 하나입니다. 작년 2023년 한국의 독서 장을 강타한 베스트셀러 1위는 세이노가 쓴 <세이노의 가르침>입니다. 자산가 세이노(Say No)가 2000년대부터 온라인 상에서 쓰던 글들을 엮어 2023년 발행한 자기계발서인데요. 가난한 삶을 이어가다 수많은 직업에 종사하며 자수성가에 성공한 뒤 다국적 기업의 부사장을 역임하다 퇴임했다고 알려진 세이노는 자칭 1,000억 원대의 순자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인데요. 세이노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실질적이고 뼈때리는 충언을 한 것이 작년 한해 한국인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한편 작년 타이완의 베스트셀러는 1위는 작가 황산랴오(黃山料)가 쓴 힐링 연애소설 <여생은 너, 늦어도 괜찮아(餘生是你 晚點沒關係)>가 차지했습니다. 실제 사랑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사실문학인 이 작품은 실연의 상처를 통해 진실하고 적나라한 미묘한 감정을 드러냄으로써 작가 자신에게 또 세상에게 치유의 가능성을 열어주고자 한 소설입니다. 작년 한 해 한국에서는 구직과 경제 활동이, 그리고 타이완에서는 연애와 사랑이 사람들에게 가장 큰 울림을 주는 주제였나봅니다.

그렇다면 100년 전, 일제시기 타이완에서의 베스트셀러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쉬쿤취안(徐坤泉), 필명 아큐동생(阿Q之弟)이 쓴 <사랑스런 원수(可愛的仇人)>입니다. 쉬쿤취안은 1935년 필명 아큐동생으로 <사랑스런 원수>를 《타이완신민보》 학예란에 160회 연재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요. 그러자 이듬해인 1936년에는 연재물을 묶어 하나의 단행본으로 출간해 일제시기에만 3차례 추가 인쇄, 무려1만부의 판매고를 올린 바 있는 일제시기 타이완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입니다. 1936년 《타이완신문학》의 편집장을 맡은 왕스랑(王詩琅)에 따르면, 이 소설은 "집집마다 읽히며 심지어 인력거와 여관의 하녀도 이 작품을 읽는다"고 평했을 정도로 1930년대 말 타이완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은 작품인데요. 쉬쿤취안은 <사랑스런 원수>의 서문에서 "타이완 같은 이런 환경에서 대중적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소설을 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라며 ‘대중문학'이 아직 자리잡히지 않았던 타이완 문학 시장에서 고군분투했던 저자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저자 쉬쿤취안(徐坤泉, 1907-1954)

쉬쿤취안(徐坤泉, 1907년 3월 25일 ~ 1954년 7월 11일)은 펑후 출신의 일제시기 타이완의 대중 소설가이자 잡지 편집자로, 그의 필명은 아큐동생이었습니다. 1935년 연재한 장편소설 <사랑스런 원수>가 말그대로 대박이 나면서 이후 <암초>(1937), <영육의 길>(1937) 등 한문으로 장편소설을 써나갔죠. 그의 이력이 상당히 화려한데요. 메이지 40년(1907년) 지금의 펑후현에서 태어나 다이쇼 7년(1918년) 가오슝으로 이주해 서재 교육을 받은 쉬쿤취안은 쇼와 2년(1927년)에 타이베이(臺北)에 정착하다 다음에는 해외로 유학해 샤먼(厦門), 홍콩(香港),상하이(上海) 등을 돌아다니며 유학을 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타이완신민보》 해외 통신기자로 활동하며 일본, 남양 등지를 누비며 창작 활동을 시작했죠. 쇼와 10년(1935년)《타이완신민보》의 타이베이 총사로 전출돼 이 신문 일간지 학예란에 장편소설 <사랑스런 원수> 등을 연재하며 인기작가로 거듭나게 됩니다. <사랑스런 원수>가 대박이 나자, 몇 년 후인 쇼와 12년(1937년)에는 잡지《풍월보(風月報)》의 편집자로 옮겨 <사랑스런 원수>를 영화로 제작하는 밑작업을 하기도 합니다. 

한문소설 <사랑스런 원수>(1936)의 내용

일제시기 타이완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사랑스런 원수>는 소꿉친구인 두 남녀가 가정의 방해로 결혼하지 못하고 완전히 다른 운명을 맞이하는 내용을 다룬 연애소설입니다. 남자 주인공 즈중(志中)은 아내의 병으로 인해 해외에서 타이완으로 돌아오고, 여주인공 추친(秋琴)은 부잣집 출신의 남편이 성병으로 세상을 떠나 가난한 고아를 둔 과부가 되었는데, 막다른 골목에 몰린 추친네 집에는 뜻밖에 비정기적으로 후원금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해외에서 사업을 성공시키겠다는 즈중(志中)이 몰래 도운 것이죠. 이 지원으로 추친의 아들 아궈(阿國)은 계속 진학할 수 있었고, 즈중의 아들 핑어(萍兒)와 동창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아궈는 부잣집 딸 후이잉(慧英)과 사랑에 빠지고 후이잉은 집안의 반대를 무릎쓰고 아궈와 결혼합니다. 즈중의 아들 핑어는 추친의 딸 리루(麗茹)와 사랑에 빠졌고, 즈중의 지원으로 혼약을 맺은 두 사람은 나란히 도쿄로 공부하러 갔습니다. 하지만 핑어는 일본 여성 기미코(君子)와 따로 사랑에 빠져 기미코는 임신까지 하게 됩니다. 이런 우여곡절을 끝에 핑어는 리루에게 참회한 후 옛 친구를 다시 찾았고, 기미코는 자식을 낳은 후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사랑스러운 원수> 에서 작가는 주로 남녀의 정이 여러 갈래로 교차하는 것을 묘사면서 동시에 전략적으로 일본적인 요소와 중국적인 요소를 함께 가지고 소설을 써서 타이완의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스런 원수>는 일제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라는 점 외에도 잡지 《풍월보》를 발판삼아 스크린 진출까지 적극 추진된 소설이다. 《풍월보》1937년 9월호는 대규모 운영을 위해 영업부가 쉬쿤취안 등 5명을 초청해 합자경영을 했다는 공고를 게재했고 그로부터 반년 뒤인 1938년 2월호 풍월보는 쉬쿤취안이 주필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한. 해당 호에서 쉬쿤취안은 한 코너에서 그의 작품 <사랑스런 원수>가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전했고, 이미 대성영화사를 결성해 일본의 큰 영화사와 협력하고 싶다고 밝혔다. 몇 달 뒤인 1938년 4월호에는 상금 30엔을 걸고 주제가를 모집한다는 소식, 그리고 5월호에 광고까지 실으며 '사랑스런 원수' 일본어판은 장원환(張文環)이 번역할 것임을 알리는 등 잡지 《풍월보》를 통해 구체적으로 영화화의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장원환(張文環)의 일본어판 <사랑스런 원수>(1938) 

1927년부터 11년간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38년 타이완에 돌아와 고향으로 돌아가 생활이 재개될 즈음에 이런 번역 작업을 받은 장원환은 이미 1935년 <아버지의 용모>라는 소설로 공모전 외 가작에 당선된 이력이 있는 작가였습니다. 《풍월보》는 장원환을 찾아 번역을 직접 부탁했으며 《풍월보》에서 석 달 동안 일본어란 주필을 맡기도 했죠. 일본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장원환은 쉬쿤취안의 원작을 상당 부분 변경했는데, 소설의 진행이나 자신의 견해를 녹여낸 부분이 많아 일본어판은 한문판과는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여주인공 추친의 묘사입니다. 원작에서 추친은 비련한 여성의 색채가 가미되어 당시 대중소설 여주인공에 부합하는 캐릭터를 갖고 있었던 반면, 장원환의 일본어판에서는 오히려 신여성의 강인한 색채가 부여되죠. 또한, 원작에서 즈중의 아들이 사랑에 빠진 일본 여성 기미코는 자본가의 딸로 고등여학교를 졸업한 여성이나 아버지의 동남아 산업이 망하면서 무희로 전락했다고 묘사하는 반면, 장원환은 기미코를 조선인으로 바꿔 같은 일본의 식민지 아래 있던 타이완인과 조선인과의 교류를 부각시켰습니다. 장원환이 11년간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도쿄에서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이 번역본에 많이 녹아있다는 것이 후대 비평가들의 평가입니다.    

<사랑스런 원수>가 보여주는 식민지 타이완인의 열망

일제시기 타이완의 베스트셀러인 장편소설 <사랑스런 원수>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한문 백화 소설’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일본어가 국어였던 데다가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문학을 한문으로 썼다는 것이 당시 타이완 독서시장에서는 상당히 새로운 산물이었죠. <사랑스런 원수>는 타이완 문학 역사 살 최초이자 가장 대표적인 한문 백화 소설로 당시 타이완 문학시장에 등장한 신흥상품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스런 원수>는 가오슝을 주 무대로 하는 타이완 향토 소설 색채가 짙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타이완 밖 중국, 일본, 남양, 미국 등지를 끊임없이 돌아다닙니다. 당시 타이완 독자들의 상상력과 시야를 타이완 본도뿐만 아니라 일본-타이완-중국-남양 등 제국으로 확대시켜주었죠. 이 책의 속표지에 등장하는 타이완의 각종 명사 및 작가 역시 한학적 소양과 서학의 지식을 두루 겸비하고, 중국어/영어, 한문/일본어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었죠. 일찍이 해외에서의 유학이나 구직, 기업경영 등의 경험을 통해 나라와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는 시야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작가 쉬쿤취안처럼 말이죠. 따라서 일본과 중국, 타이완과 중국, 타이완과 일본, 중국과 남양, 일본과 남양 등 동아시아 사회 내부 및 서로 간에 존재하는 다각적인 경쟁관계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세계정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남주인공의 개척정신과 여주인공의 정숙하고 자애로운 모습, 그리고 이들의 자식인 다음 세대들이 함께 힘을 합쳐 성공하는 모습을 통해 작가 쉬쿤취안은 기회와 발전이 열악한 식민지 환경 속에서도 침체되지 않고 용감히 개척해 나가는 남성의 욕망과 기존 봉건 사회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 여성의 욕망을 소설 속에서 잘 표현했다고 평가받습니다.  (2012:178)

 

►참고문헌

류수친 저, 송승석 역, 식민지문학의 생태계: 이중어체제 하의 타이완 문학, 2012, 서울: 역락.

 

서승임 徐承任 ([email protected]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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