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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문화협회 10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百年追求' 2

  • 2024.01.23
대만주간신보
1920년대 출간된 다양한 신문 및 잡지들. 타이완청년(臺灣青年), 타이완민보(臺灣民報), 타이완일일신보(臺灣日日新報). - 사진: Rti 서승임

타이완문화협회 100주년을 기념해 2021년 중화문화총회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백년추구(百年追求)’에 소개된 타이완문화협회. 지난 주에는 타이완문화협회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방식을 통해 타이완의 문화 운동이 전개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면, 오늘은 타이완문화협회가 타이완 역사에 있어 갖는 의의에 대해 보다 심도있게 이야기 나눠 보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오늘 프로에서 소개하는 다큐멘터리의 원본 영상은 유튜브에서도 자유롭게 시청 가능하니 저의 해설을 들으시면서 영상을 보시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0년대, 타이완문화협회가 창립되고 타이완에서 문화 운동이 진행되는 데에는 신문, 잡지와 영화 등의 새로운 매체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소개했는데요. 지금은 어디서나 접할 수 있고 심지어는 유튜브나, 각종 온라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비해 그 영향력이 점차 감소하고 있지만 당시에만 해도 상당히 획기적이고 새로운 종류의 대중매체였죠. 다큐멘터리 <백년추구>에서는 신문, 잡지, 영화와 같은 매체들이 “매우 전위적인 일”이었다고 소개합니다. 

타이완 문학사를 주제로 다양한 토론을 주재한 바 있는 타이완의 한 청년 작가 주유쉰(朱宥勳)은 1920년대 타이완 문화에 불어온 새로운 물결로, ‘민중', ‘대중'을 꼽으며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1920년대와 과거 정치의 가장 큰 차이점을 꼽자면, 과거에는 상층부, 즉 상층부 관리가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귀족이 결정하고, 학자가 결정하면 되었습니다. 학자가 전국의 1%도 되지 않았죠. 그런데 일제시기에 지식인들은 민중이 정치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민중과 함께 할 수 있는 많은 일을 해야 했습니다. 대중과 소통하고, 대중에게 전파해야 합니다. 이때 문화협회 사람들은 재미있는 방법들을 생각해낸 것이죠.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여러분들이 글을 못 읽어도 괜찮습니다. 우리 신문은 계속 출간될 것이고 신문을 알아 보지는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여러 거리에 신문 읽는 곳을 만들겁니다. 식자가 가능한 한 사람을 높은 곳에 두고 매일 신문이 나오면 신문을 가지고 와서 낭독을 하고, 몇 백 명이 모여들어서 신문 낭독을 듣겠죠.’ 이렇게 신문 안에 있는 글자 그대로 한 글자 한 글자씩 읽어주면 한 사람의 낭독을 통해 문자 매체에서 소리 매체로 옮겨가 많은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문 같은 것이 일제시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했고, 그 위력은 마치 지금의 유튜버와 유사합니다. 신문은 섬 전체 사람들에게 동일한 기회를 주었고, 같은 날 같은 사건을 인식할 수 있게 한 것이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당시 문화협회 사람들이 더 이상 낡은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어떻게든 새로운 일을 찾아내고, 또 어떤 방식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지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즉 영화나 변사와 같이요.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다양한 새로운 관념이나 시대의 사조를 도입했던 것입니다.”

식자층의 비율이 현재와 같이 높지 않았던 100여 년 전, 신문을 못 읽는 많은 대중들에게는 신문을 읽어주는 플랫폼을 마련하고, 영화와 무대 예술 같이 글자가 없어도 소통이 가능한 여러 매체들을 통해 타이완 지식인층들은 한 땅에 사는 수 많은 사람들과 시대의 사조 및 생각을 공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출발을 바로 타이완문화협회가 했었던 것이죠. 

대만대학 역사학과의 천추이롄(陳翠蓮) 교수는 구체적인 활동을 설명합니다.  

“아마도 1923년 이후, 특히 일본 유학생들이 타이완에 돌아와 여름방학을 보낼 때, 강연 그룹을 만들어 타이완 북쪽에서 남쪽까지 1년에 3~400회까지 매우 집중적인 강연을 했습니다. 강연 때는 민남어(閩南語)를 사용해 현지 언어로 강연할 수 있었죠.”

천 교수나 말하는 민남어는 당시 타이완에 살고 있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구사하는 언어로, 중국 푸젠성에서 일찍이 타이완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구사했던 구두언어입니다. 현재에도 민남어는 표준 중국어와 함께 타이완에서 많이 쓰이는 구어 중 하나이죠. 일본어나 전통 한자 문장을 읽지 못하는 대중들도 민남어를 통한 강연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주 작가는 소리를 통해 전파하는 연설의 힘이 마치 현재의 팟캐스트와 같이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내어 모두에게 정치가 이렇게 노는 것과 같은 친금감을 느끼게 했다고 평가합니다. 

천 교수는 신문 낭독, 연설 등을 통해 대중들이 정치의 흐름을 파악하면서 점차 정치에 개입,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정치에 개입과 참여는 총독부 당국의 일정에 큰 위협이 됩니다. 이러한 연설 활동은 타이완 사람들의 단결을 고무하고, 의회 운동을 제안하고, 자유와 평등이라는 사조를 도입하여 사람들을 결집시키고, 우리가 억압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여 함께 저항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원래 정치 운동이라고 했는데, 나중에는 하나의 사회 개조 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정치적 해방을 요구하는 것, 즉 의회에 청원운동을 설치하는 것 외에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계급해방이었습니다.”

주 작가는 이렇게 매체를 기반으로 한 정치 운동이 하나의 문화 조류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경험을 했다고 말합니다. 

“문화협회 시절 서양 사조 관련 책을 많이 읽은 지식인들은 정치가 단순히 무장투쟁만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눈을 떠보니 ‘문화’라는 것이 이런 기능을 하는구나. 문화가 이런 일을 할 수 있구나 깨달은 것이죠.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 당시의 지식인들과 대중들은 새로운 행동 패턴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국립고궁박물원의 우미차(吳密察) 원장은 다큐멘터리에서 1920년대의 이런 문화계몽운동을 통해 타이완 사람들은 소위 “어른이 되었다”며,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자신이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덧붙입니다.

타이완인은 일본인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을 위한 문화와 정치가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문화협회 활동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청플랫폼재단 이사장 정리쥔(鄭麗君)은 1920년대 일제시기 타이완문화협회를 통해 발발한 일련의 문화 개혁을 전체 타이완 역사 속에서 재조망합니다. 

“타이완 문화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사실 원주민 문화가 남도 문화의 본고장임을 알 수 있으며, 대항해 시대에는 동서양의 상호 작용으로 타이완에 새로운 영향도 가져왔고, 1920년대에는 문화 협회에서 지역 문화 계몽을 이끌었습니다. 일제시기에는 이미 신극운동, 문학전위운동, 현대미술, 현대음악운동 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운동들은 사람이 사상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에서 나아가 새로운 지식, 새로운 문화를 추구하고, 더 나아가 정치 사회의 개조를 촉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정 이사장의 설명과 같이 100년 전 타이완문화협회가 타이완 사회에 가져온 영향은 상당했습니다. 피식민자라는 제한적인 상황 하에서도 당시 사람들은 일본의 식민정치에 대항하는 새로운 세력과 문화를 창조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도는 100년이 지난 오늘에서도 상당히 값진 역사적 교훈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천 교수는 그럼에도 1945년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이후 이러한 타이완문화협회와 같은 진취적인 사회문화 운동의 조류가 타이완의 후세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며 그 안타까움을 전했습니다. 

“안타깝게도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상황이 크게 변했고, 새로운 통치자는 강제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추구해야 할 목표가 있어 우리는 또 다시 여러 가지 사조와 단절되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오랫동안 공백이 있었습니다. 저와 같이 현재 50대나 60대는 전쟁 후 권력 통제가 가장 치밀했던 시대에서 공부했습니다. 우리는 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중화문화, 중화사상, 혹은 나는 중국인이라는 국가 정체성을 아주 치밀하게 주입받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타이완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저는 처음으로 당외(黨外) 잡지에서 어떤 문장을 보았다. 보다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그래서 저는 아버지가 숨겨놓으신 당외 잡지를 책장을 뒤져서 찾아보면서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천 교수가 자신의 아버지의 서재에서 우연히 발견한 문장은 바로 차이페이훠(蔡培火)의 ‘타이완자치가(台灣自治歌)’였습니다. 차이페이훠가 치경사건으로 투옥되었던 1924년  타이완인들이 자유와 자치를 추구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썼던 이 노래의 가사는 타이완인들이 이 땅에서의 경작과 건설을 위해 자신의 주도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일본 제국 시민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다했으므로 당연히 지방자치의 권리를 누려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0년대 타이완 사람들은 타이완 전체를 하나로 묶기 시작했고, 존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상으로 타이완문화협회 설립 10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백년추구’의 일부를 2주에 걸쳐 Rti 한국어방송 청취자님들께 소개해보았습니다. 저는 타이완문화협회가 불어온 바람을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아가면서 일본식민통치를 겪었을 때 한국인들이 느꼈을 간절한 마음이 떠올라 감정이입이 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한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저항운동을 한 타이완 사람들의 방식을 새롭게 배우기도 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께서는 어떠셨는지요? 100년이 지난 지금, 오늘날 타이완과 한국에게 필요한 새로운 사조와 개혁의 바람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잠시 고민해보게 되는 오늘입니다.  

출처: 중화문화총회, 타이완문화협회 설립 10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百年追求>

서승임 徐承任 ([email protected])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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