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찍한 돗자리를 깔고 16척 짜리 큰 병풍을 세워놓습니다. 돗자리 위에는 가야금, 해금, 대금, 피리, 장구, 거문고 연주자들이 반원을 그리며 앉아있고, 가운데에는 노래하는 가창자가 앉아있습니다. 흰색 저고리에 푸른색 치마를 입거나 흰색 두루마기를 입은 연주자들과 달리 가운데 있는 가창자는 아리따운 꽃분홍색의 한복을 입고 노래를 합니다. 바로 조선시대 양반들이나 중산층들이 즐겨불렀다던 ‘가곡(歌曲)'입니다. 여성이 노래를 하는 여창가곡 중 그 속도가 가장 빠르다는 편수대엽 중 ‘모란은' 으로 시작하는 가사의 가곡을 들어봅니다. 현악기와 관악기가 어우러진 전주가 30초 정도 이어지면, 가창자는 아주 높은 음으로 ‘모란은’의 ‘모'를 찍고 내려옵니다. 첫 음부터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이어지는 가창자의 노래를 가만히 듣다보면, ‘과연 이제 무슨 가사지?’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가곡은 가사의 한 글자와 한 글자 사이에 공간이 많고 그 공간을 여러 음이나 혹은 가창자의 다양한 가창 방식으로 꾸밉니다. 일상적으로 말하듯 노래하는 판소리와는 많이 다르죠.
과거 양반들이나 중산층들이 즐겨불렀다던 가곡은 조선시대 상류 사회의 미학이 살아있는 풍류방 문화를 대표합니다. 처음에는 한시(漢詩)를 갖고 남성 양반층에만 즐기던 풍류인 가곡은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서자 점차 여성들도 가창을 하기 시작했고 그 가사도 정형적인 한시 외에 창작으로 그 종류가 다양해졌죠. 고종 13년인 1876년 편찬된《가곡원류》(歌曲源流)는 오늘날 가곡을 하는 연주자들이 꼽는 중요한 원서인데요. 이 가곡원류에는 남창부(男唱部) 665수, 여창부(女唱部) 191수로 고구려시기부터 조선후기까지 전해내려오는 한국 시조 총 856수를 담고 있습니다.
한국인이어도, 한국에 살아도 이렇게 역사와 전통이 유구한 한국의 시조와 가곡을 접할 기회는 많이 없죠. 그런데 이번 주 금요일(9/8) 바로 타이완 타이베이에서 한국의 가곡이 울려퍼질 예정입니다. 1909년 한국 최초의 사설 음악교육기관인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와 그 뒤를 이은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에 뿌리를 둔 유서 깊은 전통음악 단체인 한국정악원(韓國正樂院)이 처음으로 타이완을 방문합니다. 한국정악원의 시작인 1909년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던 시기로 왕조시대가 마감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가는 격변의 시기죠. 왕조시대가 마감함과 동시에 궁이나 양반층에서 즐겨하던 정악(正樂)이 연주되고 보급되는 길이 차단되자 이를 계승하고 교육하기 위해 조양구락부가 세워졌던 것입니다. 정악의 보급과 교육을 위해 시작된 조양구락부가 지금은 한국정악원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2019년에는 창립 110주년을 맞아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기념음악회인 ‘천년화락(千年和樂)’ 을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한국정악원의 타이완 방문이 특별한 이유는 그들이 처음으로 타이완을 방문한다는 데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그간 타이완에는 여러 한국의 전통음악 공연이 있었습니다. 국립대만대학교 음악학연구소 왕잉펀(王櫻芬) 교수에 따르면 과거 타이완에서 공연한 한국의 전통음악은 농악이나 산조, 사물놀이 등 민속악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왕실과 귀족들이 향유한 정악은 타이완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타이완 관객들에게는 낯선 한국의 정악을 소개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더욱 특별한 것이죠.
게다가 한국정악원은 한국의 가곡과 유사한 타이완의 전통음악인 난관(南管)과 협연을 선보입니다. 타이완의 난관은 한국의 가곡과 마찬가지로 전통악기와 가창이 어우러지는 장르의 노래로, 박을 든 가창자를 중심에 두고 전통악기인 이현, 삼현, 비파, 퉁소가 둘러앉아 가창자의 노래에 반주를 하죠. 난관도 가곡과 마찬가지로 가사가 길지 않은 대신 글자와 글자 사이 음을 길게 끓거나 한 글자를 길게 늘려 부르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심지어 두 장르 모두 가창자의 섬세한 발성을 요하죠. 한국의 가곡이 1969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2010년에는 세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면, 타이완의 난관은 1980년대 초부터 유럽 순회 공연 등 세계적인 찬사를 받다 2009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이번 한국정악원의 타이완 방문을 맞아 오늘 <대만주간신보>에서는 특별히 한국의 가곡과 유사한 타이완 난관의 특징과 그 역사를 알아보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난관(南管)은 과거 민난어(閩南語)를 사용한 중국의 동남부 지역인 푸젠성(福建省), 그 중에서도 취안저우(泉州)와 샤먼(廈門) 지역에서 성행한 음악으로, 이후 이 지역 사람들의 이주와 함께 타이완과 동남아 일대로 전해졌습니다. 난관은 과거 중국 상류층 사회 사람들의 사교 활동에서 시작된 음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난관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난관의 악곡 형태가 한나라 때의 화가(和歌)와 유사하고, 연주 순서와 구성은 당악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곡조는 송/원나라의 사곡(詞曲)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가사는 송/명나라의 희곡(戲曲)에서 가져왔다고 분석합니다. 참 다양하죠? 중국의 각 시대 별 가악의 주요 특색들을 난관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명나라 이전에는 주로 여자들이 노래를 불렀으나, 명/청나라 때에는 여자들의 참여가 금지되면서 남자들만이 난관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성별 구분없이 모두 참여 가능하죠.
난관은 전통적으로 중국 문인들이 자신들의 풍모와 재능을 발휘하면서 연주하는 사람들 간의 예의범절과 교류를 담고 있는 음악 활동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오늘날 무대에 선보이는 것과 같이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음악이 아니죠. 대신 민난어가 갖고 있는 언어 고유의 발음과 풍미를 활용해 개인의 감정을 표현하고 자신을 수양하고 동시에 문인들 사이에 품격있는 교류를 할 수 있는 수단이었죠. 게다가 전통적으로 각 지역의 사원에서 조상과 신을 모시는 일과도 관계하기 때문에 높은 신분과 집안을 나타내는 상징이었습니다.
청나라(1683-1895)와 일제시기(1895-1945)까지는 앞서 설명드린 전통적인 난관 관습이 비교적 잘 유지, 전승되어 왔습니다. 특히 일제시기 타이완총독부는 식민통치 초기 타이완 언어, 종교, 문화에 비교적 관대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게다가 이 시기에 타이완은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번창해져서 각 지방의 난관 단체인 관각 역시 흥할 수 있었다고 난관을 연구하는 학자는 말합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 정부의 황민화 정책으로 타이완 지역 문화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후 더욱 심해지면서 지역을 기반으로 한 난관 역시 그 활동이 저조해졌는데요. 1945년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고 일본정부가 타이완 섬에서 물러나면서 이 시기에 난관 연주는 잠시 활기를 띄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1949년 중국 국공전쟁(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내전)에서 패한 국민당이 타이완으로 남하해 타이완의 정치적 실권을 잡으면서, 북경어 표준어로 삼아 국어 추진 정책을 시작하고, 이에 따라 민난어와 같은 방언의 사용이 어렵게 되어 세대 간의 언어가 단절되고, 지역의 여러 사원 행사가 축소되는 등 난관 음악을 유지하기 어려운 환경이 되어버렸습니다.
1966년 중국 공산당이 문화대혁명을 시작함에 따라, 국민당도 타이완에서 1967년 중국 문화 르네상스 운동을 시작하면서 ‘국극’(國劇, 경극), ‘국악’(國樂, 서양화된 중국 기악 음악), ‘국화’(國畫)라는 용어가 생기기 시작했고, 이에 속한 장르의 예술들은 국민당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반면 난관을 비롯한 지방의 예술 문화는 상대적으로 많이 축소되었죠. 같은 시기 국민당은 서양예술음악에도 대폭 지원했고, 미국 대중음악 문화도 번성했지만, 난관과 같이 지방을 기반으로 한 전통 문화 예술은 점점 낙후되고 시대에 뒤쳐진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1975년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사망을 계기로 국민당 지지 기반이 불안정해지면서, 타이완 사회는 점차 국민당 남하 이전부터 타이완 섬에 거주하던 타이완 출신 사람과 문화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갖기 시작했는데요. 이 때 타이완의 여러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다시 지방으로(回歸鄉土)’라는 슬로건의 운동이 각 문화 영역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장제스 총통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장징궈(蔣經國)가 1977년 ‘문화 건설(文化建設)’ 정책을 천명하면서 각 지방 마다 문화센터를 설립하고, 이 때부터 국민당 정부는 전통 음악 부흥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1982년 문화자산보존법을 발포하고, 일본과 한국의 사례를 참조하여 유형/무형문화유산을 지정하기 시작했으며, 1995년에는 민간예술보존계획 등을 추진하기도 했다. 따라서 난관 역시 1980년대부터 국민당 정부의 적극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은 전통 지역 예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음악은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합니다. 특히 타이완의 난관이나 한국의 가곡처럼 그 전통과 역사가 유구한 음악일수록 시대를 거듭하면서 달라지는 정치, 경제, 사회 풍조에 따라 다양한 풍파와 변화를 겪게 되죠. 그럼에도 사람들은 전통음악이 갖고 있는 특정한 연행과 미학을 지키고 전승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이번 한국정악원의 타이완 방문으로 한국 가곡과 타이완 난관의 전통을 지켜가고 있는 연주자들이 만납니다. 그리고 2023년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이번 음악회를 통해 과거 타이완과 한국에 살았던 사람들이 향유한 풍류 문화를 다시금 되새겨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람을 읊고 달을 보며 시를 짓는다는 의미의 ‘음풍농월’(吟風弄月). 과거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향유한 음악 문화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무척 기대가 됩니다. 다음 주 <대만주간신보> 시간에는 정악원 연주자들과 함께 타이완 난관 단체와 교류한 소감을 나눠보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서승임 徐承任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