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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타이완의 그녀들 2. 찻잎 따는 여자와 전화교환원

  • 2023.08.29
대만주간신보
1900년 식민지 타이완에서 민간 전화기 사용이 시작되자 수동이었던 당시 전화 사용을 위해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를 중개하는 전화교환원이 필요해졌다. 전화교환원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 사진: 埔里影像故事館

지난 주 <대만주간신보> 시간에  직업을 갖기 시작한 타이완 여성에 관한 책을 소개하며, 일제시기 타이완 여성의 대표적인 직업군인 여교사, 여의사, 산파, 간호사, 여공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이번주에는 지난주에 미쳐 말씀드리지 못한 과거 타이완 여성의 대표적인 직업, 찻잎 따는 여자(採茶女)와 전화교환원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일제시기를 전후로 여성들이 경제활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생긴 새로운 문화 ‘자유연애'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집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연애에 ‘자유’라는 명사가 붙는 게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연애는 당연히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건데요. 100년 전만해도 그렇지 않았다죠? 시대를 막론하고 흥미로운 남녀의 연애 이야기 귀를 쫑끗 기울여 들어주세요.

과거에는 규방(閨房)이라고 해서 부녀자나 안주인이 거처하는 방을 따로 칭하는 용어가 있을 정도로 남녀유별, 즉 남녀가 살아가는 공간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었죠. 청나라 시기 타이완의 지주나 유지와 같은 상류층 집안의 여성들은 대부분 전족(纏足)을 한 채 집 안에서만 머물러있었습니다. 발을 꽉 붙들어맨다는 뜻의 전족은 어렸을적부터 어린 여아의 발가락을 발바닥쪽으로 꺾고 천으로 동동싸매서 발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하는데요. 3촌, 약 9cm의 길이가 가장 이상적인 여자의 발 사이즈라고 해서 최대한 작게 만드는 게 전족의 문화였다고 합니다. 전족을 하는 과정과 사진을 보면 지금으로서는 아동학대라고 여겨질 정도로 상당히 괴기하지만, 건륭제는 전족을 한 여성을 유달리 좋아했고, 전족이 과거 중국 상류층 여성의 대표물로 여겨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전족을 한 여성은 거의 움직일 수가 없죠. 걷더라도 그 걸음걸이의 폭도 좁아 활동 반경이 클 수 없었습니다.

타이완에서 여성들이 전족과 규방으로부터 해방되어 독자적으로 일을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입니다. 19세기 후반, 즉 아직 일제의 식민지가 되기 전 타이완은 농업 사회로 경제의 주력은 쌀과 설탕의 수출이었습니다. 1860년 이전까지만 해도 직업이 세부적으로 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몸을 많이 쓰는 농사일은 주로 남성의 몫이었고, 여성이 밖에 나가서 일하는 것은 경제적 원천이 되지 못했죠. 그런데 1860년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1860년부터 1863년까지 중국이 톈진조약으로 타이난의 안핑, 타이베이의 단수이, 지룽, 그리고 가오슝 등의 여러 항구를 잇달아 개방해 서방과 무역을 하는 통상항으로 삼은 후 차 산업이 급격히 성장해 기존의 쌀과 설탕 시장을 추월하게 됩니다. 1895년 일본 식민지가 되지 전 타이완 차의 수출 총액은 이미 타이완 경제 작물 중 53%로, 36%였던 설탕을 따라잡고 1위로 뛰어올랐습니다. 중국과 타이완의 경제사를 연구한 사학자 린만홍(林滿紅)의 <차, 설탕, 장뇌업과 타이완의 사회경제적 변천>이란 책에는 타이완이 개항 이후 많은 취업 기회가 창출되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찻잎을 수확하는 것은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 재배와 달리 6~7개월에 걸쳐 총 7회를 수확해야 하며, 매번 여러 차례 나누어 수확하는 데에는 많은 인력이 필요한데요, 그래서 “별도로 찻잎을 따는 여자를 고용하여 차를 따야”했다고 합니다. 청나라 말기의 타이완 여성은 바로 차 밭에서 공식적으로 직업을 갖기 시작한 것이죠. 

톈진조약으로 찻잎 수출량이 늘자 찻잎을 따는 인력 충원이 필요해졌다. 청나라 말기부터 타이완에서는 찻잎을 다는 여성(採茶女)이란 직업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 사진: Lafayette Digital Repository

일본 식민정부의 1905년 통계에 따르면 매년 20만 명의 여성을 찻잎을 따는 일에 고용해야 했다고 합니다. 고산 지대에서 찻잎을 따는 여성이 있다면 수확된 찻잎을 시내로 가져와 차를 만드는 작업에도 여성들이 투입되었는데요. 일제시기 타이베이 가장 번성한 상업지구였던 다다오청(大稻埕)에서는 타이완 여성들이 대나무 체를 들고 차를 만드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찻잎 따는 여성(採茶女)이라는 여성 특유의 직종은 일제시대에 접어들어서도 쇠퇴하지 않았죠. 당시 타이완 사회의 각계각층의 직업여성들을 소개하는 1930년 <대만민보(臺灣民報)>의 한 기사에서는 총 열한 가지 직업을 소개했는데 이 중 찻잎 따는 여성의 직업에 대한 소개가 있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찻잎은 1년에 15~6회 정도 채취할 수 있는데, 그들은 매년 팀을 이루어 원정을 다닌다"고 소개합니다. 여성들이 무리를 지어 1년 중 약 8개월을 외지에서 일을 한 것인데요. 찻잎 따는 여자의 나이는 12세부터 30세까지이지만 주로 20살 안팎의 여자가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차 따는 여자의 하루 평균 월급은 4각(角)으로 월수입으로 계산하면 12엔에 달하는데 이는 일제시기 당시 중하위 공무원 수준에 근접한 금액입니다. 

<대만민보>의 연재기사에는 이외에도 간호가, 전화교환원, 여급(女給), 교사, 담배제작하는 여공, 양말을 만드는 여공 등 다양한 새로운 직종의 직업여성들을 소개합니다. 이 중에는 지난주에 다루지 않은 전화교환원이 눈에 띄는데요. 1900년부터 타이완에서는 민간 전화가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전화를 실제 사용하는 인구도 적고 전화 산업의 성장도 더뎠지만, 전화교환원 인력은 나날이 증가해, 특히 남성에 비해 높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여성들이 이 새로운 직종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에 익숙한 요즘 세대에 전화교환원이라는 직업은 그 이름도 정확한 업무 내용도 모두 낯선데요. 전화교환수라고도 하는 전화교환원은 전화를 건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서 서로 간에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중매를 해주는 직업이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전화기가 수동이었기 때문에 교환원이 반드시 있어야 연결이 될 수 있었다고 하네요. 수화기가 여러 대 있는 우편국에 나란히 앉아 ‘여보세요, 몇 번이십니까?’라는 의미의 일본어 문장, “모시모시 남방 남방”을 말하며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를 이어주던 전화교환원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전화가 막 사용되기 시작한 과거 일제시기에는 마치 방송국의 아나운서와 같이 중요한 직업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당시 한국에서도 대중문예잡지인 <별건곤>에 1927년 실린 ‘여자직업안내(女子職業案內)'라는 보도에 따르면 전화교환원은 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한 15살에서 20살까지의 비교적 어린 여성들이 도맡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20세기 초 사회에 진출하는 직업여성들이 점차 증가하자 남녀가 만나는 방식도 달라졌는데요. ‘자유연애(自由戀愛)'라는 말이 바로 일제시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자유연애. 이 네 글자가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이고 센세이셔널한 개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1900년생 소설가 우줘류(吳濁流)는 자신의 회고록인 <무화과(無花果)>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에 ‘연애'라는 단어는 없었다고 말하며 젊은 남녀는 함께 걸을 수 없었는데 “한 번만 걸어도 여자는 천하다라는 소리를 들어야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극장에서 남녀는 구분된 자석에 앉아야 했는데 젊은 부부라할지라도 당시 분위기상 합석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남녀가 교제를 할 경우 받게되는 도덕적 비난이 얼마나 심하고 가혹했을지 짐작이 가는 대목입니다. 기원전 공자의 교훈인 ‘남녀부동석'이 일제시기 초기에도 여전히 타이완 사회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었죠.  1909년생인 타이완 장로교회 황우동(黃武東) 목사 역시 1930년 자신들이 펑후에 갔었던 기억을 회고하는 글에서 “남녀가 길에서 함께 동행할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처음 (펑후) 사람들은 내가 안사람과 함께 외출하는 것을 보고 놀라움과 못마땅한 눈초리로 우리를 주시했다”고 적었습니다. 

다이쇼와 쇼와 초기인 1920년대에 들어서자 타이완에는 ‘연애결혼’ 열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1921년 대중문예잡지 <대만(臺灣)>에는 일찍이 미국 유학을 다녀온 황씨가 결혼 준비는 "남녀가 먼저 사귀어야 한다"는 것 외에도 "결혼 전 두 사람 사이의 충분한 이해와 사랑"중요하다고 말했는데요. 지금에 와서보면 진부한 말이 아닐 수 없지만 아직 봉건사회의 남녀유별 문화가 만연했던 당시에는 상당히 획기적인 주장이었습니다. 같은 해 <대만청년(臺灣青年)>이란 잡지에도 “새로운 시대의 여성과 연애결혼"이란 제목의 기사에는 “자각을 한 대다수의 부인들은 더 이상 강제적인 수동적인 결혼을 달가워하지 않으며, 진정으로 순수한 이성을 배경으로 한 연애의 자유로운 결혼을 요구한다.”며,  "어떤 학자는 결혼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여성이 새로운 시대의 개조자”라고 말한다며 자유연애와 연애결혼을 강조했습니다. 

일본에 유학 가서 교육을 받은 여성이 많아지고 직업여성이 증가하면서 연애와 결혼은 더 이상 과거 봉건사회에서의 규범과 풍조를 이어나갈 수 없게 되었고, 부모의 중매가 아닌 자유로운 연애로 남녀가 만나는 새로운 문화가 필요해졌던 것이죠.

그렇게 100년이 흘러 연애와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된 오늘날. 타이완과 한국은 또 다시 새로운 연애과 결혼 문화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뉴스에서는 저출산과 인구감소 문제를 이야기합니다만, 100년 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어렵게 쟁취한 자유연애, 연애결혼조차 왜 지금의 젊은 남녀들은 하고싶어 하지 않는지 우리는 보다 청년들의 삶에 보다 깊이 주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서승임 徐承任 ([email protected])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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