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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타이완 유행가 황금시기를 풍미한 가수 춘춘(純純)

  • 2023.05.16
대만주간신보
1930년대 타이완 유행가를 대표하는 목소리의 주인공 가수 춘춘(純純) - 사진: 위키피디아

케이팝(k-pop). 이제는 단순히 국내의 대중음악 차원을 넘어 전세계의 젊은 층들에게 위안이 되고 즐거움을 선사하는 음악이 되었죠. 오늘 <대만주간신보> 20번째 시간에는 이렇게 대중을 사로잡는 대중음악의 시발점이 되는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봅니다. 

1930년대 일본제국의 두 식민지, 타이완과 조선에서는 ‘류코-카(流行歌)’ 즉 유행가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유행가’라는 용어가 처음 출현하게 된 것이 이 무렵이죠. 1920년대말부터 유행가 바람이 불자 조선의 각종 대중문예잡지에는 유행가라는 신흥음악은 서양의 클래식이나 학교에서 가르치는 음악과는 다른 신종의 음악으로 구분하는 기사들이 속출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음악평론가였던 홍종인은 1931년 조선 음악계를 총정리하면서 “째즈 성격의 유행가를 '신흥음악'이라고 표현하며, 기존 클래식('음악예술')과 구분된다.  클래식은 사회와 격리되어 있으며, 유행가는 최근 유행하고 있으나 선정적인 데서 둘 다 문제점 있다”며 유행가를 최근 유행하나 선정적인 음악으로 규정했고, 홍난파는 1939년 한 가정잡지 글에서 유행가를 “대개로 그 노래가 음탕하고 난잡한 것이 많고 그 음악도 또한 속되고 저렬한 까닭에 이것이 사회의 풍기를 문란케하고 젊은 남녀들의 마음을 타락 시키기 쉽다”고 표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행가의 세력은 점점 커져서 마치 홍수 때 물밀듯이 각 가정에 밀려들어 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라고 반문하며 한창 유행하는 유행가를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가급적 들려주지 말 것을 권장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1930년대 유행가가 갑작스럽게 성행하자 학교나 가정에서 이를 유의해한다는 권고 성격의 글들을 우리는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같은 시기 타이완에서도 음반 산업과 유행가 발전의 황금기가 1920년대 말부터 시작해 1930년대 그 절정을 이뤘습니다. 이 시기에 타이완에서 최초로 경영한 일본축음기상회(이후 콜롬비아사) 외에도 일본의 빅터, 타이헤이(泰平), 아사히, 닛토 등이 진출했고, 타이완 본토 현지 음반 회사, 이를 테면  양표(羊標), 문성(文聲), 복우락(博友樂), 미악(美樂), 동아(東亞) 등의 운영도 정점을 찍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바에 따르면 타이완에서 1929년 일본축음기상회에서 발행한 <오묘진행곡 烏貓行進曲>(19005) 음반에 찍힌 '유행가(流行歌)'라는 한자에서 ‘유행가’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했습니다. 새로운 음반 녹음 및 취입 기술에 힘입어 대중가요 창작이 점차 전통적인 격률을 깨고 보다 발랄하고 백화문의 형태로 타이완 민중들의 생활에 스며들게 되었고, 유행가가 기존의 전통희곡을 대신해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유행가가 성행하면서 유행가를 녹음한 음반을 재생할 수 있는 ‘축음기’ 역시 타이완 사회에 중요한 매체이자 문화자본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타이완의 유행가는 현재 타이완과 중국 등지에서 통용되는 중국어, 즉 만다린 차이니즈(普通話, Mandarin Chinese)가 아닌 타이완어(臺語, Taiwanese)로 불렸습니다. 타이완 섬에서 생산되어 타이완어로 부르는 ‘타이팝’(Tai-pop)의 원조가 바로 일제시기 유행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30년대 폭발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타이완 유행가의 중심에는 가수 춘춘이 있었습니다. 타이베이 출신의 유행가 가수 춘춘( 純純, 1914-1943)은 30년대 타이완 유행가 절정의 시기를 대표하는 목소리 중 하나입니다. 당시 콜롬비아 음반사 전속 가수였던 춘춘은 사계홍, 월야수, 망춘풍, 우야화, 도화읍혈기 등 지금까지도 불리는 당시 유행가들을 부른 가수입니다. 그럼 여기서 잠시 춘춘의 목소리를 한 번 들어보고 이어가볼까요?

1933년 콜럼비아 음반사에서 발매한 가수 춘춘(純純)이 부른 '망춘풍' (望春風) 앨범

다이쇼 3년인 1914년에 태어나 쇼와 28년인 1943년에 생을 마감한 춘춘은 30년도 채 못산 채 일제시기 타이완에서만 한 생을 보냈습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의 춘춘의 부모님은 국수 노점을 운영했으며, 춘춘은 13살에 공학교를 중퇴하고 타이완 오페라 거자이시(歌仔戲) 극단에 가입해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콜롬비아 음반사 전속 가수가 된 춘춘은 이 무렵 타이베이 기차역 뒤 새 무대 맞은편에 카페를 열었는데 인지도로 인해 장사가 잘 되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커피를 마시러 가게에 온 장씨 성의 타이베이제국대학 남학생과 사랑을 서로 사랑했지만, 남자쪽 부모는 춘춘이 가수라는 직업을 가진 것이 마땅치 않아 반대해 이 둘은 결국 이별할 수 밖에 없었다네요. 그렇게 사랑했던 한 남자를 떠나보낸 춘춘은 결국 일본인인 시라이시(白石) 선생과 결혼했습니다만, 폐결핵이 있던 남편의 증상이 심해지자 먼저 숨을 거뒀고, 남편에 이어 춘춘 역시 얼마 가지 못해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말죠.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또 다른 타이완 유행가 여가수 아이아이(愛愛)는 훗날 춘춘을 기억하며 (춘춘)의 “순수함이 그녀를 해쳤다"고 개탄할 정도로 춘춘은 당시 남편을 많이 사랑했다고 합니다.    

인생은 복숭아꽃 가지와 같아(人生相像桃花枝)

꽃이 피기도 죽기도 하지(有時開花有時死)

꽃은 봄에 다시 피건만(花有春天再開期)

사람은 죽으면 살 날이 없네(人若死去無活時)

춘춘이 부른 노래로 유명한 '도화읍혈기'(桃花泣血記)의 한 가사입니다. 저희 <대만주간신보>의 인트로이기도 하죠. 2/2 박자에 신나는 리듬과 달리 가사에서는 애환이 묻어납니다. <도화읍혈기> 는 1932년 상하이 연화영업공사에서 제작한 흑백 무성 영화가 타이완에 상영되자 당시 타이완의 영화 관계자들은 홍보를 위해 특별히 음악을 제작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영화 방백사인 잔티엔마(詹天馬)를 초대해 영화의 줄거리에 따라 가사를 쓰게 했고 왕윈펑(王雲峰)이 멜로디를 붙였는데, 이 때 춘춘이 보컬로 초청되었다고 합니다. 

1929년부터 타이완 오페라인 거자이시나 서양 음악에 반주가 있는 소곡들을 음반으로 취입하기 시작한 일본축음기상회가 이후 콜럼비아로 바뀌면서 콜럼비아는 팝(pop), 즉 유행가 음반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춘춘이 가수로 참여하게 됩니다. 일본곡부터 민요, 창작곡까지 춘춘은 타이완의 콜럼비아 유행가 탄생기의 유일무이한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제의 황민화 정책으로 일본 식민 정부는 타이완어 노래를 금지했습니다.  타이완의 각 음반사들은 인사와 배급 등의 문제를 재조정하기 시작했고 춘춘도 이 때 전속 가수로 활동하던 콜럼비아 레코드를 떠나 닛토(日東) 레코드에서 임시 가수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전쟁과 황민화 정책 등으로 시국이 불안하고 생활 물자가 부족해진데다 패결핵까지 겹처 춘춘은 노래를 부르기 힘들었고, 1943년 1월 2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1930년대 타이완 유행가를 풍미한 춘춘의 목소리를 기억하고자 오늘은 엔딩곡으로 춘춘이 부른 ‘우야화’(雨夜花)를 준비했습니다. 

서승임 徐承任 ([email protected])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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