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타이완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천청보에 이어, 오늘 <대만주간신보> 시간에는 일제시기 타이완의 음악계에서 두각을 보인 한 인물에 대해 소개합니다. 피아니스트 가오츠메이(高慈美, 1914-2004)입니다. 가오츠메이는 1914년 타이완 남부 가오슝(高雄)의 강산(岡山)이란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기독교’와 ‘의사’는 그녀 집안의 중요한 두 축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타이완 최초 장로교 신도이자 전도사였고, 아버지는 타이완총독부의학교(總督府醫學校)를 졸업한 의사였습니다. 어머니는 타이완 초대 양의사의 장녀였죠. 11명의 형제자매 중 둘째였던 가오츠메이의 가족 사진을 보면 1910년대 타이완 유지층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여전히 중국식 전통 옷을 입고 아버지는 보타이까지 갖춘 양복을 입고 있습니다. 딸들은 큰 꽃문양이 있는 블라우스 상의와 무릎 아래 종아리를 살짝 덮는 정도 길이의 주름치마를 입고 오르간 슈즈와 같은 신발을 신어 세련되고 단정한 옷차림을 보입니다.
일반 타이완인 가정에 비해 자본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풍부한 환경에서 태어난 가오츠메이는 다섯 살이란 어린 나이에 일본의 한 유치원으로 유학을 갑니다. <근대타이완여성사>(2017)를 쓴 역사학자 홍위루(洪郁如)는 가오츠메이를 일제시기 타이완에서 일본으로 조기 유학 간 여성의 전형으로 소개합니다. 1919년 유치원서부터 도쿄에서 공부한 가오츠메이는 타이완에서 최초로 일본 유학을 한 여성(우샤오 吳笑)이 1899년 메이지여학교에서 공부한 것과 비교해도 꽤 이른 시기에 그것도 어린 나이에 일본에서 유학을 한 타이완 여성 중 한 명입니다. 그가 어린 나이에도 일본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가 매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오츠메이는 친 언니와 함께 이토(伊藤)라는 성을 가진 일본의 한 기독교 부부 가정에서 머물면서 유치원 생활을 순조롭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1923년 일본의 관동대지진으로 타이완에 돌아올 수 밖에 없던 가오츠메이는 소학교에서 공부하다 1927년 다시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으로 넘어가 바이코여학원(梅光女學院, 현 바이코학원대학 여자단기대학부)에서 공부합니다. 미국 뉴저지 출신의 교회 목사 부부에 의해 1872년에 설립된 사립학교인 바이코여학원은 음악 과목을 적극적으로 가르쳤는데, 영국 국적의 피터스(Peters)라는 선생님이 당시 가오츠메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바이코여학원 시절부터 10대 중반이었던 가오츠메이는 학교 음악회에서 피아노를 치는 등 피아노를 꾸준히 배울 수 있는 환경에 있었습니다. 바이코여학원 강당의 한 피아노 앞에서 찍은 가오츠메이의 사진이 이를 증명합니다. 바이코여학원 강당의 뒷편에는 목제의자와 탁자가 있고 이 탁자 위에는 일본식 분제 화분이 놓여있으며 그 앞으로 그랜드 피아노가 한 대 있었습니다. 가오츠메이는 바이코여학원 교복을 입고 피아노 의자에 앉아 오른발을 페달에 살짝 올려놓은 채 사진을 찍었습니다. 함께 찍힌 피아노에 놓여있는 악보의 곡목이 궁금합니다.
바이코여학원을 졸업한 가오츠메이는 1931년 일본제국음악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전공합니다. 도쿄에 소재한 제국음악학교에는 가오츠메이와 같이 타이완인도 있었지만 조선인도 적지 않았습니다. 가오츠메이의 선배로는 조선인 정훈모(2회 졸업생)와 안보승(3회 졸업생)이 있죠. 타이완과 조선 모두 일본의 식민지였던 당시 본국에는 음악을 전공할 수 있는 대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고등 음악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본국을 떠나 일본이나 미국으로 가야했습니다.
1935년 8월 졸업 전까지 가오츠메이는 제국음악학교에서 피아노 레슨과 연습뿐만 아니라 다양한 작품을 직접 오선보에 필사하고, 중요한 피아노 작품을 분석하거나, 피아노 교수법을 다루는 페다고지(pedagogy) 과정도 이수합니다. 그녀가 직접 필사한 작품은 대부분 18-19세기 유럽의 주요 고전 작품으로, 요하네스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모차르트 디베르티멘토 D 장조, 헨델의 오라토리오 ‘사울(Saul)’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곡이 유독 눈에 띕니다. 바로 타이완 작곡가 천스즈(陳泗治)의 'Formosa No. 2 FanTasie' (美麗島 第二番) 라는 제목의 곡입니다. 가오츠메이보다 3살 많은 거의 동년배나 다름없는 천스즈(1911-1992)는 타이베이 장로교 집안 출신으로 타이베이의 한 기독교 학교를 중심으로 음악활동을 해온 작곡가이자 음악교육가입니다. 가오츠메이가 당시 어떻게 천스즈의 작품을 받아 직접 필사까지 할 수 있었는지는 확인이 안되지만, 과거 유럽의 고전음악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타이완 작곡가의 작품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타이완의 유명 음악학자 쉬창후이(許常惠)는 외국 선교사들이 전도 과정에서 타이완에 교육시설을 설립해 서양음악을 적극적으로 장려했기때문에 타이완 초기 서양음악가 다수가 교회 출신이거나 교회와 밀접한 관련되있음을 언급한 바 있는데요. 가오츠메이와 천스즈 외에도 린추진(林秋錦), 뤼치엔성(呂泉生), 천신전(陳信貞) 등 일제시기에 활동한 소위 타이완의 1세대 음악가들 대부분이 기독교 출신입니다.
졸업 논문으로 <피아노 페다고지 용법 연구>를 쓴 가오츠메이는 1935년 8월 제국음악학교를 졸업하는데요, 졸업하기 1년 전인 1934년 여름, 가오츠메이는 자신과 같이 일본에 유학 중인 다른 타이완 음악가들과 함께 타이완으로 돌아가 전국 순회 음악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바로 1934년 8월에 열린 ‘향토방문음악회(鄉土訪問音樂會)'입니다. 지난 1월 <대만주간신보> 두 번째 편 '1933년 타이완 3인의 조선 방문’ (2022.01.10 방송)에서 소개한 양자오자(楊肇嘉)를 필두로 <대만신민보>의 선전에 힙입어 8월 11일부터 10일간 타이베이를 시작으로 가오슝까지 총 7개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음악회를 개최하는데요. 여기서 가오츠메이는 피아노 독주 무대를 선보입니다. 8월 15일 타이완의 중부에 소재한 타이중공회당에서의 공연에서는 양자오자의 차녀(양샹잉, 楊湘英)로부터 헌화를 받기도 했는데요. 타이완 최초의 대규모 음악활동이었던 ‘향토방문음악회'는 당시 타이완인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습니다. 당시 교통이 불편했고 도로 사정은 좋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열기가 뜨거웠고 청중들이 열정적이어서 피곤함도 다 잊을 수 있었을 정도였다고 가오츠메이가 이후 회고했을정도로요.
제국음악학교에서의 학업을 마치고 1937년 타이완에 본격적으로 돌아온 가오츠메이는 타이베이의 신공원 맞은 편에 위치한 일본기독교교회(현 濟南基督長老教會)에서 대도정 출신 리씨와 혼인식을 가졌습니다. 이 둘의 인연은 타이완 장로 교회계의 남과 북을 대표하는 두 기독교 집안을 잇는 행사로 일컬어졌을 만큼 하객들도 상당 수 참여했습니다. 결혼 후에도 가오츠메이는 자신의 음악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1938년 타이베이공회당에서 타이완기독교청년회가 주관한 음악회에도 참여하고 1939년에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독일 교수에게 피아노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타이완이 광복을 맞이하고 국민당 정부가 내려온 후에도 가오츠메이의 연주자, 또 교육가로서의 행보는 그치지 않습니다. 1947년 타이완문화협진회 제1회 전국음악경연대회에서 심사위원을 1948년에는 현 타이완사범대학 음악과에 교직을 맡게되었습니다. 같은 해 가톨릭 미션 스쿨인 정수여중(靜修女中)에서도 출강했었죠. 이렇게 각종 여학교과 사범학교의 음악과 교사를 겸임하고 타이완에서 열리는 음악대회에 심사를 맡으며 음악가, 음악교육가로서 자신의 업적을 쌓은 가오츠메이는 1984년, 70세의 나이에 은퇴합니다.
기독교와 타이완의 유지 네트워크 아래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음악으로 타이완 사회에 기여한 가오츠메이는 타이완을 대표하는 1세대 여성음악가입니다. 가오츠메이의 학창 시절을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녀가 1929년~1932년 일본에서 유학하는 동안 쓴 일기의 역할이 큰데요. 현존하는 그녀의 총 4권(1년에 1권)의 일기 중 1929~30년은 바이코여학원 학생 시절 생활 관련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제국음악학교 입학 시험 과정, 그녀가 참여했던 시험이나 일본서 만난 타이완 동포 심정을, 1931년 일기는 제국음악학교 재학을 위해 도쿄에 도착한 이후의 생활을 담고있습니다. 현재 중앙연구원(中央研究院, Academia Sinica)에서 소장하고 있는 가오츠메이의 일기는 일본 유학을 겪은 한 타이완 소녀의 개인사뿐 아니라 타이완과 일본 여성사, 교육사 등 서로 다른 영역의 첫 기록이라 할만큼 중요하고 값진 사료입니다.
일제시기, 가정이 유복하고 해외 유학 여건이 가능했던 타이완 여성의 경우 절대다수가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공부한 학교와 이수한 과목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 추세를 따르는데, 종교를 기반으로 교회학교를 선택하거나 개인의 흥미와 능력에 기반해 양재, 음악, 영어 등의 전문 과목을 선택했습니다. 이 두 가지 추세를 모두 보여주는 가오츠메이의 기록과 행보를 통해서 우리는 일제시기 전문 교육을 받은 타이완 신여성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洪郁如 《近代台灣女性史:日治時期新女性的誕生》國立臺灣大學出版中心 2017
張隆志,郭月如,吳叡人,連憲升,王昭文,嚴婉玲《恩典之美:高慈美女士圖像史料選輯》 中央研究院臺灣史研究所出版 2008
서승임 徐承任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