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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음기로 서양 고전 음악을 듣는 타이완 학생들

  • 2023.02.21
대만주간신보
자이시사적자료관(嘉義市史蹟資料館) 내 전시되어 있는 일제시기 축음기 - 사진: Rti 한국어방송 서승임

지난 주 일본축음기상회의 타이완 진출과 1926년 타이완에서의 첫 음반 녹음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해 드렸는데요. 이번 주에도 축음기 이야기를 이어가 볼까 합니다. 일제시기 타이완 사람들은 지금처럼 가정이나 길거리 등 언제 어디서나 쉽게 음악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기계인 축음기가 아무 곳에나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죠. 고가의 물건이었던 축음기는 명문학교나 문예인들이 모이는 다방이나 식당, 시에서 운영하는 공회당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특정 장소에 겨우 한 대를 놓을 수 있을 정도로 희귀한 물건이었습니다. 오늘 타이완주간신보에서는 타이완인, 특히 학생들과 젊은 지식인들이 축음기를 들었던 대표적인 장소, 타이베이고등학교와 타이베이 음악찻집(킷샤텐)을 중심으로 일제시기 타이완의 축음기 문화를 소개합니다  

1922년 4월 현재 국립대만사범대학(國立台灣師範大學)이 있는 구팅(古亭)에 설립된 타이완총독부고등학교(台灣總督府高等學校)는 1926년 타이베이고등학교로 개명되면서 일제시기가 끝난 1945년까지 이어져 온 타이완의 대표적인 남학교였습니다. “흰색 두 줄이 그어진 모자가 딸린 교복은 당시 모든 타이완인들의 열망”이었다고 소개할 만큼, 타이베이고등학교에 입학만 하면 제국대학에 별도의 시험 없이 입학 가능했던 타이완의 명문학교였죠. 심지어 입학생 대다수는 일본인어서 이 학교의 총 2,400명의 이상 졸업생 중 타이완인은 559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적은 수에도 불구하고 이 학교 출신 타이완인들은 리덩후이 전 중화민국 총통을 비롯해 부총통, 중앙연구원 원장, 작가, 기업가 등 이후 타이완의 각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타이베이고등학교는 일제시기 타이완 남학교를 대표하는 명문학교였던 것이죠.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어간 타이베이고등학교를 막상 입학하고 나니 의외로 자유와 개인의 문화적 함량을 기르는 것을 중시한 학교였다고 졸업생들은 하나같이 이야기 합니다.  타이베이고등학교(台北高等學校) 개교 9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다큐멘터리에서는 연세가 지긋한 타이베이고등학교 출신 타이완인들을 인터뷰했는데,  여기서 20회 졸업생 구관민(辜寬敏)은 “타이베이 고등학교 안은 다른 세상이었다.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학교가 학생들에게 많은 자유를 허용했다는 것이다”라고, 17회 졸업생 스춘런(施純仁)은 “갑자기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학교는 인문학(liberal arts) 교육 제도를 일본에 뒤쳐지지 않게 시행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참고서적 역시 당시 일본에서 갓 출판된 책이었다고 합니다. 전 중화민국 총통이자 타이베이고등학교 출신인 리덩후이(李登輝, 1923-2020)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이와나미 문고 시리즈가 당시 유행했습니다. 나는 700~800권의 책을 갖고 있었고, 그 중에는 외국고전들도 포함합니다. 친구들과 괴테, 칸트 외 다른 서양철학자들에 관해 토론했고, 만약에 잘 모르면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부터 르네상스 혁명까지 책 목록을 정리했습니다. 영어 선생님인 시마다 킨지가 내 지도선생님이었는데, 그는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의 원서를 가르쳤고, 괴테에도 정통했습니다.주로 독일식으로 글을 썼으며 매우 심오했습니다."

리덩후이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당시 타이베이고등학교 출신 학생들이 서양 고전 문학이나 철학을 중심으로 지식을 쌓아 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유로운 학교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이 거주하는 기숙사 안에는 운동방과 함께 음악 레코드 방이 있었다고 합니다. 음악 레코드 방에는 큰 나팔의 축음기와 음반이 놓여 있어서 학생들이 수업을 마치고 편하게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는데요. 음반은 주로 베토벤 교향곡 6번과 같은 교향곡이나 독일어 가곡 등이 많았다고 합니다. 학교가 영어, 독일어에 관심을 많이 두었어서 독일어 노래를 부르는 것은 학생들 삶의 일부였다고도 해요. 당시 축음기 가격은 1,00엔이고, 음반 한 장은 1~3엔 정도였습니다. 감이 잘 안오실 텐데요. 1920년대 초등학교인 공학교 선생님의 한 달 월급이 17엔이었다고 하고, 타이완 작가 예스타오(葉石濤, 1925-2008)는 “일제시기 1달에 20엔이면 모든 식구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고, 한 달에 10여엔만 있어도 그럭저럭 잘 지낼 수 있었다”라고 했으니, 당시 100엔이던 축음기는 일반 가정에서는 쉽게 들여놓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축음기가 있는 음악 레코드 방에서 서양 고전음악을 감상하던 타이베이고등학교 학생들처럼 1930년대 적어도 1만 5천명의 중등학교 이상 학생은 공부하기 위해 타이베이와 같은 타이완의 몇 안되는 주요 도시에 살게 되면서 공통된 학교 행사, 공통된 언어, 유사한 생활 습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축음기 문화도 그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교 외에 음악찻집(音樂喫茶店, 온가쿠킷샤텐)도 축음기로 서양식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문화공간이었습니다. 일제시기 “타이베이시의 긴자”라 불렸던 용정(榮町, 사카에마치)은 타이완 최초의 서점, 은행, 백화점, 공회당 등이 밀집되어 있던 대표적인 도시 공간입니다. 위치는 대략 현재의 시먼(西門) 지하철역과 228공원 사이에 해당하죠. 음악찻집도 이 중심지를 주변으로 여러 군데 있었는데요. 대표적인 음악찻집은 ‘자연장’(紫烟莊)입니다. 용정 바로 아래인 신기정(新起町)의 한 빌딩 내 위치해있던 자연장은 고등학교 학생들이 읽는 잡지《대고》(臺高, 다이코)나《상풍》(翔風, 쇼후) 내 광고로 실릴 만큼 고등학생과 제국대학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 광고에는

“미국, 프랑스에서 직수입한 레코드 도착, 단순한 실내 디자인, 아름다운 여급(女給)과 함께 당신의 겨울밤을 천천히 보내세요. 특히 고교생 대환영”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1920-30년대 찻집은 서양식 빵이나 과자를 제공하고 서양화로 벽면을 장식한 뒤 축음기로 음악을 틀어주었다고 합니다. 최대한 일본과 서양의 분위기를 자아내고자 했죠. 빠질 수 없던 것이 바로 서양 클래식 음악을 틀 수 있는 음반이었습니다.

신기정에 위치한 자연장 음악찻집이 타이완 고등학생들의 장소였다면, 대도정(大稻埕)에 위치한 볼레로(Bolero) 음악찻집은 당시 작가, 화가들이 자주 모이던 곳이었습니다. 쇼와 9년(1934) 클래식음악 애호가였던 류수이라이(廖水來)가 프랑스 작곡가 조셉 모리스 라벨(Joseph-Maurice Ravel, 1875~1937)의 작품 ‘볼레로’(Bolero, 1928)에서 따와 만든 이 가게 안에는 축음기를 포함한 고급 음향 설비가 있었고 벽에는 캔버스들이 걸려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유명 타이완 문학가 궈쉬에후(郭雪湖), 장완취안(張萬傳), 양산랑(楊三郎), 장원환(張文環), 뤼허뤄(呂赫若)등이 단골이었으며, 당시 활동하던 화가들의 후원 역할을 하며 대만미술사에서도 중요한 위치 차지하는 볼레로는 가장 최근에 수입된 서양 악곡을 듣고 음반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타이완의 몇 안되는 공간이었습니다.

1920~1930년대 타이완의 음악찻집은 근대교육을 받은 학생이나 예술계 인사, 의사, 변호사, 기자 등 소위 근대 직업의 중산계층 사람들이 새롭게 모이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찻집에 모여 서양 고전 음악을 감상하는 일은 이들의 취미 중 하나가 되었고요.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소학교나 공학교에서는 간단한 멜로디의 창가 과목을 배우고, 중등학교에서는 창가나 음악 수업 외에도 음악 감상 동아리가 있어 과외로 음악을 접할 수 있었던 타이완 학생들은 졸업 후에도 음악을 감상하는 취미를 이어갔습니다. 1938년 타이완총독부 문부성이 타이완 학생 생활 조사한 결과 예술활동 1위인 영화에 이어 음악 감상이 2위를 차지할 만큼, 음악은 근대교육을 받은 타이완 사람들의 중요한 여가생활이 되고 있었습니다. 서양 고전 음악 중 가장 감상을 많이 한 작품 상위 5위는 바이올린, 피아노, 기타, 만돌린, 관현악 순이었고, 그 뒤를 이어 교향악과 성악 작품이 있었습니다. 음반으로 만들어진 일본 전통음한 사쿠하치와 샤미센도 종종 들었으나, 음반의 대부분은 베토벤 교향곡이나 비제의 카르멘 같은 서양 고전음악이 주류였습니다.

음반이나 축음기를 구입하는 비용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음악을 듣고 싶은 타이베이 도시 사람들은 자연스레 음악찻집으로 향했죠. 《대만기행》(台灣紀行)이란 작품으로 유명한 일본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도 도쿄외국어대학 출신의 한 타이완 학생이 홀로 모지항 인근 거리의 음악찻집에서 멘델스존 음반을 듣느라 출항하는 배를 놓친 이야기를 그리기도 했을 만큼, 일제시기 이미 서양 문화를 접하기 시작한 다수의 학생과 지식인들은 서양음악 애호가가 되고 있었습니다. 고가의 축음기와 미국, 프랑스, 일본에서 수입된 음반을 중심으로 타이완의 인재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그렇게 타이완에서도 서양 고전 음악이 감상을 위한 음악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습니다. 

 

참고문헌 및 자료

鄭麗玲. 躍動的青春 : 日治臺灣的學生生活. 臺北市: 蔚藍文化, 2015.

李彥旻. 白線帽的青春 臺北高等學校歷史紀錄片(The glory day of Taihoku Higher School). 臺北市: 國立臺灣師範大學, 2012. Film.

 

- 서승임 徐承任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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