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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와 타이완

  • 2023.01.03
대만주간신보
대만예술신보(臺灣藝術新報) 1936년 6월호에 소개된 최승희 순회 공연 광고 - 사진: 《臺灣藝術新報》第二卷第六號

일제시기 타이완에 살았던 사람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대만주간신보>의 진행자 서승임입니다. 처음으로 청취자분들과 인사를 나누네요. 반갑습니다. 먼저, 오늘부터 시작되는 <대만주간신보>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드릴게요. 식민지 타이완의 주요 일간지였던 <대만일일신보>를 패러디해서 <대만주간신보>라고 이름을 붙여봤어요.  신문에 등장했던 주요 사건부터 타이완 사람들이 남긴 개인 일기나 레코드 음반 등 타이완이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사료들을 바탕으로 일제시기 타이완에 살았던 사람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프로입니다. 타이완의 원주민과 한인, 그리고 일본인과 조선인까지, 일제시기 타이완에 살았거나 이곳을 여행했던 사람들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모아 소개하겠습니다. 100년 전 타이완의 일상으로 들어가보시죠! 

쇼와 11년인 1936년 여름. 식민지 조선 출신 여성 무용가 최승희(1911-1969)가 7월의 무더위를 무릅쓰고 일제의 또 다른 식민지인 타이완에서 전국 순회 공연을 했습니다. 7월 3일부터 타이베이를 시작으로 지룽, 타이중, 타이난, 가오슝, 자이까지 약 2주 간 타이완 전국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는 최승희의 공연 소식에 타이완 주요 언론들은 일제히 주목했습니다. 일간지 <대만일일신보>(臺灣日日新報)는 첫 공연이 있는 3일 최승희의 타이베이 일정을 상세히 소개했고, 대중문예지<대만예술신보>(臺灣藝術新報)와 <대만문예>(臺灣文藝)는 최승희의 자서전 글을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1936년 7월 한 달은 타이완에 '최승희 열풍'이 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식민지 조선에서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중이던 최승희는 1926년 3월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일본인 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6-1962)의 공연을 보고는 같은 해 4월 졸업 후 바로 일본 도쿄로 건너가 이시이 바쿠를 사사하며 3년간 서양 무용을 배웠습니다. 1929년 잠시 조선 경성으로 돌아와 남산 근처에서 자신의 무용연구소를 설립한 최승희는 부채춤, 칼춤, 승무와 같은 조선의 전통 춤을 함께 연마하며 창작 무용을 선보이기 시작했죠. 1933년 다시 도쿄행을 택한 최승희는 1934년, 1935년 연달아 자신의 창작무용발표회를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일본 예술계에서 공인된 무용가이자, 이시이 바쿠의 제자가 아닌 독자적인 무용가로 자리매김 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명 ‘반도의 무희’라는 별칭도 이 무렵부터 생기기 시작했죠.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를 포함한 몇몇 일본 예술계 인사들은 최승희 후원단체인 백십자회(白十字會)를 결성해 최승희를 재정적, 정신적으로 후원하기 시작했고, 최승희는 영화와 레코드 음반 등 일본과 조선을 넘나들며 대중문화에까지 영향력을 뻗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최승희는 당시 대만문예연맹(臺灣文藝聯盟)이란 단체에서 활동하던 문학가, 우쿤황(吳坤煌, 1909-1989)의 초대로 1936년 7월 타이완 순회 공연을 결정했던 것이죠. 그렇다면 타이완 문학가인 우쿤황은 어떻게 조선인인 최승희를 알고 만났으며 그녀를 설득할 수 있었을까요? 최승희와  타이완의 교류에 관해 처음으로 연구한 일본의 타이완 문학 연구자, 시모무라 사쿠지로오(下村作次郎, 2007)는 1930년대 타이중과 도쿄를 중심으로 문화 운동을 했던 우쿤황이 1930년대 초 도쿄의 좌익 문예 인사들과의 교류 및 인맥을 통해 최승희를 만나 타이완 순회 공연을 기획할 수 있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1936년 7월 최승희의 타이완 순회 공연은 당시 타이완의 문학과 무용계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서양 무용과 조선의 전통 춤을 개량해 창작한 최승희의 무용은 당시 타이완 문예계 인사들에게 문학 이외에 무용이란 장르의 흡입력과 영향력을 알려주었죠. 이 공연을 기획한 우쿤황은 같은 해 2월 열린 최승희의 타이완 공연 환영회 개최 소식을 <대만문예> 4/5월호에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무용 전문가나 무용 관련 지식 영역이 거의 전무한 타이완에 있어 (최승희의 방문은) 타이완 인재를 배양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라고요. 또한 당시 <대만문예>의 총편집을 담당하고 있던 장싱젠(張星建, 1905-1949)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최승희의 (타이완) 공연 이후 예술·음악·영화 등 모든 문화연계 사업을 포괄하는 계획을 본격 추진하고, 잡지 편집의 경우 수준을 높여 작가·기고자에게 원고료를 지급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싶다.”고요. 기존에 문학이란 장르에 국한해서만 <대만문예>라는 잡지를 꾸려가고 있던 사람들에게 최승희의 무용 공연은 타이완의 문화예술을 보다 폭넓게 설계할 수 있는 일종의 지표가 되었던 셈이죠. 

게다가 최승희가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 무용가라는 점도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타이완과 조선 모두 일본의 식민지였던 당시, 타이완 문예계 인사들의 주요 이슈 중 하나는 '향토(鄉土)'였기 때문이죠. 향토,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한국적인 것'이라고 할까요? 일본의 주류 문화 예술이 갖고 있지 않은 '우리만의 것'을 선보이는 것이 타이완과 조선 두 식민지 문예계 인사들의 주요 이슈였던 것 같습니다. 마침 최승희는 1930년대 초부터 조선의 전통무용을 연구하고 개량해 자신만의 무용을 한창 창작하고 있었죠. 예를 들어, 조선인 한량이 술에 취한 상태로 몸을 이리저리 흔드는 모습을 해학적으로 묘사한  <에헤라노아라> 랄지, 조선 전통음악을 배합한 창작무용인 <조선풍의 듀엣>과 <세 개의 코리안 멜로디> 등, 타이완 순회 당시 선보였던 무용 작품은 타이완에 향토 예술에 대한 자극과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실제로 최승희는 자신을 타이완으로 초대한 타이완 문예계 인사들에게 식민지 조선의 무용가로서 자신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소개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도 생경했던 무용이라는 예술장르를 예술화하여 제국의 중심인 도쿄에서 흥행에 성공한 점, 그리고 그 창작과 흥행의 중심에는 '조선적인 것'이 있다는 점이 타이완 문예계 인사들에게 귀감이 되었던 것이죠. 공연 기획의 중심에 있었던 우쿤황이 "같은 처지에 있는 타이완인에 대한 (최승희의) 동정 어린 비판은 많은 배울 점이 있어"라고 언급하였듯이, 대만문예연맹 사람들과 최승희는 일본의 식민지라는 유사한 상황에 처한 공감과 격려를 기반으로 서로 간의 신뢰를 쌓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타이베이에서 공연을 본 타이완 의학박사 두총밍(杜聰明, 1893-1986)의 부인 린쐉수이(林雙隨)는 <조선풍의 듀엣>과 <에헤라노아라>가 가진 유머를 칭찬했고, 당시 타이베이 여자고등학원의 음악 선생으로 재직중이었던 미우라 토미코(三浦富子)는 <습작>이란 작품에서 드러나는 최승희의 에너지와 힘, 그리고 창작성이 돋보였다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최승희는 타이완 특유의 무용에 대해 굉장한 호기심을 보이면서, 소개받은 원주민 춤과 거자이시(歌仔戲)를 "시간되면 꼭 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한 여름 밤의 꿈이었을까요? 1936년 7월 최승희의 타이완 공연 직후 대만문예연맹은 같은 해 <대만문예> 7/8월호 발행을 끝으로 8월 해산해야 했고, 공연 직후 도쿄로 건너간 우쿤황은 9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경시청에 체포되었습니다. 그의 체포 소식을 전한 <대만일일신보> 기사는 "최승희의 타이완 공연 역시 우쿤황이 전개한 민족계몽운동이었다"고 전했습니다. 

1943년, 우쿤황과 최승희는 다시 만났습니다. 그러나 장소는 도쿄도, 타이완도, 조선도 아닌 중국 쉬저우(徐州)였습니다. 우쿤황의 아들 우옌허(吳燕和)에 따르면, 우쿤황이 1943년경 최승희가 쉬저우의 황하대희원(黃河大戲院)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적극 주선했고 공연 당시 여러 자리를 도맡아 성원했다고 하더군요. 아들의 증언 외에 우쿤황과 최승희의 교류에 대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만, 적어도 식민지 문예인인 이 둘의 관계가 결코 단발적이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36년 7월 최승희의 대만 순회 공연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1938년 국가총동원법으로 일본의 전시체제가 무르익어 가기 직전 일본 당국의 비교적 촘촘하지 않은 감시 하에서 두 식민지 문예인들의 자발적인 의지로 개최하고 교류할 수 있었던 마지막 공연이었던 만큼 그 역사적 상징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下村作次郎 . 宋佩蓉 譯.  2007. “現代舞蹈和臺灣現代文學:透過吳坤煌與崔承喜的交流.” 邱貴芬, 柳書琴. 『臺灣文學與跨文化流動』, 臺北:行政院文化建設委員, 159-176.

吳燕和, “重新認識父親吳坤煌”, 吳坤煌著, 『吳坤煌詩文集』, 臺北市: 國立臺灣大學出版中心, 2013.

徐承任, “「鄉土」之想像與體現:1930年代日治殖民地臺灣與朝鮮舞蹈家崔承喜的不解之緣” (2023년 출판 예정)

 

관련 사료

“半島の舞姬崔承喜孃:七月三日から臺北で公演” 『臺灣日日新報』 (1936/06/16).

 梧葉生, “來る七月來臺する舞姬崔承喜を圍み東京支部で歡迎會”《臺灣文藝》(1936年4/5月號).

“崔承喜女史を繞る島都女性座談會1— 觸合ふ心の琴線 絢爛“麗人花園”に內台鮮の優しい融和” 『大阪朝日新聞』(1936/07/11).

“劇團,舞踴團を通じ民族運動に狂奔:臺中州南投生れの吳坤煌、治安維持法違反で送局”『臺灣日日新報』(1937/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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