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타이완에서 가장 화제를 모으고 있는 영화는 오늘 갓 재상영된 허우샤오시엔(侯孝賢) 감독의 대표작인 ‘비정성시(悲情城市)’입니다. 일제시대 말기부터 중화민국 초기까지를 배경으로, 한 가족의 비극을 그려내면서 서글픈 타이완의 현대사를 묘사한 비정성시는 최초로 228사건을 다룬 영화입니다. 1989년 영화 개봉 당시 계엄령이 해제된 지 불과 2년이 지나고 타이완이 아직 민주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금지시되는 화제인 228사건을 과감하게 건들고 다루며 그 시대 타이완인들에게 큰 격려와 감독을 선사했으므로 이 영화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영화로 평가받았습니다.
또 비정성시는 1989년 9월 15일 제46회 베니스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획득함으로써 최초로 세계 3대 영화제(베니스영화제, 칸영화제, 베를린영화제)에서 수상의 쾌거를 거둔 타이완 영화가 됐는데, 이는 타이완 영화 창작자에게 큰 격려와 힘이 됐을 뿐만 아니라, 타이완 영화의 전성시대를 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역사, 문화, 기술 분야에서 모두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영화는 ‘비정성시’가 유일하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영화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지닌 비정성시는 상영된 지 33년 만에 4K 디지털 그레이딩 버전으로 오늘(2월 24일)부터 전국 약 60개 영화관에서 재상영됐습니다. 요즘에도 비정성시 각본집 개정판과 200장이 넘는 스틸컷으로 구성된 비정성시 33주년 기념 스틸사진집, 400여 페이지의 비정성시 인터뷰집 개정판 등 비정성시 관련 서적들이 연이어 출시되어 단시간에 베스트셀러로 올라 있습니다. 이 외에, 스팟 화산 시어터(光點華山電影館)에서 열리는 스틸사진, 비하인드 사진, 영화 포스터 등을 전시하는 비정성시 특별전시회도 수많은 영화팬들을 이끌어냈는데, 비정성시의 재상영은 단순한 영화적 이벤트를 넘어서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된 것 같습니다.
스팟 화산 시어터에서 비정성시 특별전시회가 개최 중이다. - 사진: FB/牽猴子電影粉絲俱樂部 페이지 캡쳐
한편, 영화 재상영과 함께 타이완 유명 디자이너 천스촨(陳世川)이 설계한 4가지 새로운 버전의 포스터도 정식으로 판매되기 시작했습니다. 작년 12월 말 포스터가 공개된 지 얼마 안 되고 어떤 한국 회사로부터 포스터 대리판매 허가 요청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를 통해 비정성시의 한국에서의 인기를 엿볼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작년 10월에 개최된 2022 한국부산영화제에 참석한 비정성시의 주연배우인 량차오웨이(梁朝偉, 양조위)가 가자회견에서 젊은 세대에게 가장 추천하고 싶은 영화로 비정성시를 선택했습니다. 량차오웨이는 영화에서 청각‧언어장애인을 연기했는데, 이는 량차오웨이가 홍콩인으로써 타이완어를 할 줄 모르는 것에 대한 제작진의 해결책이기도 하고, 중화민국 초기 국민당 정부의 압박을 묵묵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타이완인의 처경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중화민국 초기 타이완에서 존재한 가장 심각한 사회적 문제는 외성인과 본성인의 갈등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 이후로부터 중국에서 타이완으로 이민해온 '외성인(外省人)’들과 원래 타이완에 살고 있던 ‘본성인(本省人)’들이 언어, 생활습관, 역사적 기억, 사회적 자원의 불공정한 분배 등 다양한 요인으로 서로 적대하고 충돌하곤 했습니다. 영화에서는 당시 외성인과 본성인의 상호 배척 상황과 정권 교체로 인한 타이완인들의 정체성 혼란을 고스란히 보여줬습니다. 영화에서 량차오웨이가 연기한 남자주인공 원칭(文清)이 기차에서 외성인을 색출해 내고 있는 본성인 청년들에게 “너는 본성인인가? 외성인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데, 원칭은 아주 불안하고 두려워 보이지만 “난… 타이완인입니다.”라는 소리를 힘겹게 내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감독적인 순간으로 뽑혔습니다. 이 장면과 함께 영화의 영혼으로 여겨진 주제음악 일본의 뉴에이지 기악 음악 그룹인 센스(S.E.N.S.)가 제작한 ‘A City Of Sadness’가 흘러나와 감동을 더했습니다. 여기서 A City Of Sadness를 함께 듣겠습니다.
사진: FB/牽猴子電影粉絲俱樂部 페이지 캡쳐
A City Of Sadness와 같은 영화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멜로디만으로 구성된 음악 외에, 비정성시에서는 기존 있는 노래와 가사 있는 노래도 OST로 사용됐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 명 청년 지식인들이 국민당 정권을 비판할 때 말을 못해 대화를 낄 수 없는 원칭이 뒤로 빠져 아내와 독일 민요 ‘로렐라이 언덕(Die Lorelei) ‘의 연주곡을 들으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습니다. 로렐라이는 '요정의 바위'라는 뜻으로 독일의 라인강에 솟아 있는 바위의 이름입니다. 이곳은 아름다운 여자 요정이 매혹적인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강을 지나던 사공들이 그 노랫소리에 유혹돼 배가 바위에 부딪혀 죽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낭만적이고 슬픈 이야기를 담은 이 노래가 흘러나온 이 장면은 청년 지식인들이 그들의 낭만적인 포부를 위해 생명을 잃을 것이란 비극을 예고합니다.
또 영화 후반부에는 원칭의 큰 형 원슝(文雄)이 자신이 운명하는 요릿집에서 가수가 ‘비극적인 운명’이란 타이완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가수에게 “울고 있는 거야? 이게 무슨 노래야? 부르지 마!”라고 꾸짖는 장면이 있습니다. 비극적인 운명은 이 장면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를 연기한 배우인 차이전난(蔡振南)’이 영화를 위해 직접 작곡작사하고 만든 곡이며 원슝을 포함한 임씨 가족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했습니다.
배우 천숭융(陳松勇, 좌)이 영화에서 '원슝(文雄)' 역을 맡았다. - 사진: FB/牽猴子電影粉絲俱樂部 페이지 캡쳐
비정성시는 량차오웨이 등 실력파 배우들의 걸출한 연기와 허우샤오시엔 감독만의 독특한 영상미로 관중들의 눈을 사로잡는 동시에 A City Of Sadness, 로렐라이 언덕, 비극적인 운명 등 삽입 음악으로 관중들의 귀를 사로잡아 영화 스토리에 더욱 몰입하게 만듭니다.
음악은 영화와 관객을 연결시키는 의사소통의 고리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보여준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비정성시’의 재상영 소식과 영화 내용, 그리고 영화음악들에 대해서 ‘비정성시’가 재성영된 오늘의 멜로디가든 방송에서 소개해 봤습니다. 방송 엔딩곡으로 ‘비극적인 운명’을 띄어드리고 싶습니다. 영화에서는 남가수 차이전난이 이 노래를 불렀으나 여기서 여기수 차이츄펑(蔡秋鳳) 버전의 ‘비극적인 운명’을 들려드리면서 오늘 방송을 마치겠습니다. 진옥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