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과 한국의 다양한 문화 이야기
-2023.02.28.
-진행: 노혁이, 백조미
-2.28
(타이완 2.28 사건과 관련하여 이날을 전후로 포르모사 문학관, 타이베이토크, 랜드마크 원정대, 연예계 소식, 멜로디 가든 등 프로그램을 통해 2.28을 주제로 방송하였습니다. )
한국에도 228이 있다. 대구의 228민주화운동. 1960년 이승만 독재정권의 부패와 무능이 극에 달하면서 제 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저질러진 불의, 부정에 분노해서 대구지역 8개 고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정부수립이후 최초의 민주화 운동. 지금이야 대구가 보수적인 색채가 아주 강한 곳이지만, 당시 대구는 남한에서 가장 진보적인 동네로 꼽혔다고 한다.
당시 일요일이었던 1968년 2월 28일. 대선을 앞두고 야당인 민주당에서 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선거 연설이 계획되어 있었는데, 당시 장면 후보는 같은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 박사가 선거직전에 수술후 후유증으로 사망하면서 거의 대통령급의 위상을 갖고 있었다. 당시 자유당 정부는 장면 박사의 유세장에 학생들이 몰려서 주목을 받을까 두려워서, 대구시내 공립학교에 일요일 등교를 지시. 교육당국은 일요등교를 강행했다. 임시 시험이라 단체 영화관람, 토끼사냥 등을 핑계로 등교를 종용.
자유당의 꼼수를 파악한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벌이면서 2월 27일부터 시위 시작. 2월 28일에 학교에 모인 학생들은 자유당을 규탄하는 집회를 일으키며 궐기. 학교를 뛰쳐나갔다. 1200명의 학생들이 참여했고, 120명이 체포. 하지만 경찰은 당시 시민들의 따가운 눈초리 땜문에 결국 처벌을 완화해야했고, 주동자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석방. 전국에서 잇따라 학생들의 시위가 퍼져나가기 시작했었다. 이는 결국 3.15 부정선거에 이어 4.19 혁명이 이르는 도화선이 되었던 사건.
2·28 사건(二二八事件)은 1947년 2월 28일부터 같은 해 5월 16일까지 대만 전역에서 일어난 민중봉기 사건이다. 중화민국 정부 관료의 폭압에 맞서 대만의 다수 주민인 본성인(本省人)들이 불만을 표출하며 항쟁을 일으키자, 중국 국민당을 위시한 외성인(外省人)들은 본성인을 폭압적으로 학살했다. 대만에서는 2·28대학살, 2·28혁명, 2·28봉기, 2·28사변 등으로도 부른다.
1947년 2월 27일, 타이베이 어느 빌딩안에서 담배를 팔던 여인이 허가받지 않고 담배를 팔았다는 이유로 담배주류공ㅅ가 요원과 경찰에 의해 단속되고 폭행을 당하는 일이 도화선.
1947년은 일본 식민통치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로 정권이 이양된지 2년. 대만에서 대대로 살아온 원주민, 중국인인 본성인, 그리고 해방과 함께 들어온 중국인, 외성인들이 뒤섞인 가운데, 국민당 정부는 담배, 설탕, 차, 종이, 시멘트 등을 국유화하고, 물자 상당수를 공산당과 내전 중이던 본토의 국민당으로 보냈다. 원주민 언어 대신에 북방식 중국어를 ‘국어’로 선포했고, 원주민은 공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당시 대륙은 대륙에서의 공산당과 내전을 지원하기 위한 일종의 군사기지처럼 취급되었다. 대다수가 본성인인데도, 외성인의 절반에 불과한 월급을 받았는데, 식민지 시기에 본성인이 일본인 월급의 60%를 조금 넘게 받던 것보다 더 극심한 차별. 한마디로, 대만에 살던 대다수의 내성인들에게 국민당 정부는 일본보다 못했으면 못했지 더 나은 점이 하나도 없었던 시대. 물자 부족과 부패가 맞물려 물가는 수십, 수백배로 뛰었다. 그야말로 정부의 폭정에 대만 민중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이르던 시점.
그러다 밀수 담배를 팔던 여인의 담배와 돈을 모두 빼앗고, 항의하는 그녀의 머리를 권총으로 내리찍었다. 그리고 항의하는 군중을 향해 발포까지해서 한 시민이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이튿날 군중은 전매총국 타이베이 분국을 점거하고 서류에 불을 질렀는데, 헌병대는 비무장 군중에 총을 난사했다.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뛰어나오면서 항쟁은 대만 전역으로 번졌다.
3월4일 당시 천이 총통의 요청으로 국민당 군대가 대만에 상륙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즉시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차별적인 진압에 돌입. 통행금지가 내려진 가운데 길거리에 보이는 사람은 그대로 총을 맞고 쓰러졌고. 그해 5월16일까지 3달이 채 안되는 기간 동안 사망자가 2만명 이상으로 알려진 참극. 광주민주화운동의 사망자/행방불명자 210여명, 419혁명 당시 186명이 사망했다. 228사건이 발생했던 1947년 3월. 한국에서는 무려 7년7개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4.3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남조선로동당의 인민유격대와 국군/경찰이 충돌하면서 서북청년단이라는 극우 무장 단체가 백색테러를 벌였던 사건. 제주 4.3사건의 민간인 희생자수가 1만5천~2만5천명으로 알려져있는데, 참 이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저런 비극을 겪으면서 살았다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다.
2.28과 관련해서 아주 유명한 영화가 있다. 바로 1989년의 영화 비정성시. 당시 27세의 양조위가 주연인 벙어리 사진사 역으로 열연을 했는데, 대사 한마디가 없지만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다. 이 영화는 2.28 사건을 중심으로 네명의 형제들이 겪은 비극에 대한 이야기.
비정성시의 배경이 한국인들이 아주 좋아하는 지우펀. 198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해서 타이완을 식민지화한 일본은 지우펀 바로 옆 마을인 진과스에서 금맥을 발견. 진과스에 사람과 돈이 몰려들자 바로 이웃마을이 지우펀도 덩달아 발전을 했다. 일본인들은 풍광이 뛰어난 지우펀에 집을 마련했는데, 이후로 지우펀은 굽이굽이 골목마다 가게와 음식점,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는 숙박업소가 들어섰다. 당시에는 무엇이든 풍성했고, 지우펀은 작은 홍콩, 작은 상하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금맥이 고갈되자 지우펀은 다시 사람이 끊어졌고, 폐광 이후의 쇠락한 마을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1989년에 비정성시 영화 덕분에 다시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고, 2002년에 센과치히로의행방불명이 세계적으로 흥행하면서 다시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사실 미야자키하야오는 공식적으로는 지우펀에서 배경 소재를 얻었다고 언급한 적이 없고, 일본의 어느 온천장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지만, 사람들이 지우펀이다!라고 믿자 그뿐.
지우펀이 배경인 비정성시에 지금은 그 유명한 홍등이 켜진 내리막 골목길. 거기에 조선옥이라는 술집이 있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