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 번이라도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을까요? 반복되는 삶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문학입니다. <포르모사 문학관>에서 타이완 특유의 문학 세계 속으로 함께 들어갑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포르모사 문학관> 시즌2의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2024 ‘타이베이-상하이 포럼(臺北上海城市論壇)’이 지난 17일 타이베이에서 열린 가운데, 장완안(蔣萬安) 타이베이 시장은 16일 환영 만찬회에서 상하이에서 초등학교에 다녔던 타이완 로맨스 소설가 충야오(瓊瑤)를 언급하며 평화적인 양안 교류를 호소했습니다. 장 시장은 “다친 마음은 진심으로 치유해야 한다”는 충야오의 대표작 《황제의 딸(還珠格格)》의 명대사를 인용해 타이베이와 상하이 간 지속적인 교류와 협력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습니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연애소설로 유명한 충야오는 중화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작가이자 프로듀서로, 지난 4일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소식이 전해지자 충야오의 지인은 페이스북을 통해 충야오의 유서와 유작을 공개했는데요. 충야오는 유서에서 “나는 불꽃이다. 나는 이미 전력을 다해 자신을 불태웠다. 불길이 꺼지기 전에 이 방식을 택해 훨훨 날아갔다.”면서 “나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고 나를 위해 웃어주라. 생명의 아름다움은 사랑할 수 있고 미워할 수 있고 웃을 수 있고 울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들을 다 겪어봤지만, 젊은 친구 여러분, 절대로 생명을 쉽게 포기하지 말고, 나처럼 늙어서 고민하면 된다. 그때는 모두가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갖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충야오는 생전에 안락사에 대한 긍정적 입장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습니다. 치매에 걸린 남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 그는 존엄한 죽음을 축구하며 사람마다 고통 없이 죽을 자유와 권리가 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죽음은 그의 인생관을 관철하는 결말이라고 할 수 있죠. 많은 독자들은 사랑하는 작가의 죽음을 한탄하면서도 이런 엔딩이 매우 ‘충야오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충야오의 작품이 타이완 사람들의 마음에 얼마나 깊이 파고들었는지를 묻는다면, ‘충야오스럽다’는 단어를 통해 알 수 있는데요. 만약 한 사람이 드라마처럼 애틋한 사랑을 추구하면 “너 충야오냐”는 농담을 듣게 됩니다. 충야오는 단순한 로맨스 소설가를 넘어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불꽃같이 한평생을 뜨겁게 살았던 충야오에 대해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충야오스럽다는 인생 ✨
충야오의 본명은 천저(陳喆)로, 필명 충야오(경요)는 중국 최초의 시집인 《시경(詩經)》에 나오는 “나에게 복숭아를 주면 아름다운 옥으로 보답한다(投我以木桃,報之以瓊瑤)”는 시구에서 유래하며, 아름다운 옥을 가리킵니다. 1938년 중화민국령 쓰촨(四川) 청두(成都)에서 태어나 전쟁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가족과 함께 상하이, 후난(湖南) 등 곳으로 이주했다가 1949년 국민당을 따라 타이베이로 건너왔습니다. 국어교사인 부모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문학을 동경했고, 18살 때 25살 연상의 국어 선생과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약속했습니다. 사실 충야오의 부모도 사제연애였는데, 아버지는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국어 선생이었습니다. 이 열렬한 사랑은 경험자인 부모의 반대로 끝났지만, 훗날 충야오의 데뷔작인 《창밖(窗外)》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대학에 붙지 못한 충야오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결혼하고, 문예지 《크라운(皇冠)》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1963년 자전적 장편소설 《창밖》으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크라운》 잡지사의 사장 핑신타오(平鑫濤)를 만나 그와 불륜관계를 맺었습니다. 충야오에 따르면, 《창밖》 발표 후 첫 남편은 자신이 첫사랑을 소설로 쓴 것에 불만을 품었고 자신의 성공에도 질투를 느꼈습니다. 또한 《창밖》의 성공으로 충야오와 핑신타오의 관계가 빠르게 깊어지면서 두 사람은 각자의 배우자와 이혼하고 1979년 결혼했습니다. 충야오 작품 속의 비극성과 사랑의 숭고함은 바로 이 세 번의 뼈저린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충야오와 두 번째 핑신타오(平鑫濤) - 사진: 충야오 페이스북
《창밖》을 시작으로 충야오는 평단과 독자를 모두 사로잡는 작품들을 잇따라 발표하며, 솔직하고 과감한 사랑 이야기로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에 도전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1960년대부터 시작된 영화 붐을 타고 작품의 영화화에 매진하여 많은 배우들과 영화 OST를 부른 가수들을 스타로 만들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창밖》으로 데뷔한 충야오 영화의 페르소나 린칭샤(林青霞, 임청하), 그리고 가수 펑페이페이(鳳飛飛)와 덩리쥔(鄧麗君) 등이 있습니다. 그럼 이어서 《창밖》의 OST, 펑페이페이가 부른 ‘팥 한 알(一顆紅豆)’을 띄워드립니다.
로맨스 소설가에서 드라마 여왕으로 👑
두 번째 남편 핑신타오와의 사랑은 불륜으로 시작했지만 두 인생의 막바지까지 이어갔습니다. 두 사람은 1976년 영화사를 차려 충야오 소설의 영화 제작을 시작했는데, 영화 대본과 영화 노래의 가사는 충야오가 책임집니다. 또한 1987년 타이완 민주화와 함께 양안 간 이산가족의 고향방문이 개방되면서 충야오는 중국을 방문한 최초의 타이완인 프로듀서로, 양안 텔레비전과 영화 합작의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거의 모든 충야오의 영화나 드라마가 중국에서 촬영되고 중국 배우들도 대거 출연했습니다. 자유연애를 추구하는 충야오 작품은 문화대혁명을 겪은 중국에서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장완안 시장이 양안 교류의 자리에서 충야오를 언급한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면서 충야오의 영화는 영화관의 대부분 황금 시간대를 차지해 다른 영화사들로부터 눈총을 맞았는데요. 충야오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폭들이 피범벅이 된 죽은 개의 머리를 영화관 사장의 차에 올려놓고 협박한 사건으로 인해 영화 제작을 중단하고 드라마 제작에 들어갔다고 털어놨습니다. 충야오 드라마 중 1998년 방영된 《황제의 딸》은 중화권을 넘어 아시아, 심지어 미국과 유럽의 화교 커뮤니티를 풍미하고 충야오의 인지도를 한층 더 확대했습니다. 이 작품의 인기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수많은 리메이크는 물론이고 지난 10월 넷플릭스에 재방송되자 큰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충야오가 직접 작성한 명대사도 인터넷 밈으로 만들어져 충야오를 모르는 신세대에게 계속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랑도 미움도 당당하게 하는 충야오의 뚜렷한 성격은 그의 작품에 충실히 투영되어 있습니다. 시적인 소설도, 눈물을 자아내는 영화도, 대중성이 강한 로맨스 코미디도 수많은 젊은이들의 마음 속에 사랑에 대한 동경과 열망을 심어줬습니다. 비록 오늘의 관점에서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나 캐릭터 설정이 다소 있지만, 작품이 주는 감동은 변함없습니다. 충야오는 스스로 결정한 대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치며 한 시대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엔딩곡으로 드라마 《황제의 딸》의 OST, 타이완 원주민 남성 듀엣 그룹 ‘동력화차(動力火車)’의 ‘당(當)’을 띄워드리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포르모사 문학관>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
1. 陳怡璇,「雙城論壇歡迎晚宴 蔣萬安引瓊瑤著作談交流與和平」,中央社。
2. 葉冠吟,「瓊瑤生前留遺筆 叮囑年輕人千萬別輕易放棄生命」,中央社。
3. 鄭曉今,「瓊瑤在中國大陸的影響力」,亞洲週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