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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샹인(賴香吟) 《하얀 초상화(白色畫像)》, ‘하얀색으로 하얀 시대 그린다’

  • 2023.02.20
포르모사 문학관
백색 테러를 겪은 일반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하얀 초상화(白色畫像)》- 사진: Eslite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 번이라도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을까요? 반복되는 삶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문학입니다. <포르모사 문학관>에서 타이완 특유의 문학 세계 속으로 함께 들어갑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포르모사 문학관> 시즌2의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지난 주에 올해 타이베이 국제 도서전에서 펼친 타이완 작가와 한국 작가의 교류에 대해 소개해 드렸고 이번 주는 이어서 도서전에서 소설부문 대상을 수상한 작품《하얀 초상화(白色畫像)》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책 제목을 듣고 바로 눈치 채신 청취자들이 아마 계실 건데요. 진옥순 아나운서님께서 이미 시즌1에서 《하얀 초상화》의 작가 라이샹인(賴香吟)을 소개해 드린 바가 있기 때문이죠. 《하얀 초상화》는 작년 11월에 열린 타이완 최대 문학상 ‘금전장(金典獎, Taiwan Literature Golden Award)’에서도 대상을 수상했는데요. 오늘은 이 높이 평가되는 작품에 초점을 맞추어 보다 자세하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타이완은 한국과 같이 오랜 독재를 겪어온 끝에 드디어 민주화된 나라입니다. 1949년부터 1987년 까지, 무려 38년 간이나 이어진 타이완성 계엄령(臺灣省戒嚴令)은 시리아의 바트당 정권이 경신하기 전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긴 계엄령 기간이었습니다.  계엄령이 발효된 후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 권리가 제한되어 사람이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거나 모함을 당해 목숨을 잃은 등 비극은 끊임없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는 타이완의 ‘계엄시대’, 혹은 ‘백색 테러 시대’라 불립니다. 《하얀 초상화》는 바로 백색 테러 시대를 겪어온 일반 시민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입니다.

저는 책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하얀 초상화’란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을 했는데 백색 테러 시대에 어떤 색깔도  캔버스에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독재정권의 압박으로 어쩔 수 없이 스스로의 색깔을 없애고 투명인간처럼 산다는 뜻인가요?

마침 라이샹인은 소설에 수록된 후기에서 독자 대신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얀 초상화란 배경이 하얀가, 아니면 인물이 하얀가? 가장 깔끔한 하얀색은 결국 정치적으로 독재정권과 반공주의의 대명사가 되었다. 초상화 안에 뚜렷하지 않은 사람들은 큰 재난을 겪지 않고 단지 평범하게 살았다면 어떻게 그를 그릴 수 있는가? 대놓고 말하면 그릴 필요가 있는가?’, ‘하얀색으로 하얀 인생을 그리면 과연 무엇이 보일까?’ 

예상과 달리 라이샹인은 그 잔인한 역사나 민주운동에 투신한 열사의 파란만장한 삶을 묘사하지 않고 오히려 일반 시민의 일상에서 출발해 담백한 필치로 시대상을 그려냈습니다. 즉, 하얀 초상화의 주인공은 정부에 대항해 사회운동을 이끄는 등 지도적 인물이 아니고, 먹고 살기 위해 분주하는 평범한 사람이야말로 라이샹인이 그리고 싶은 ‘하얀색’입니다.

일련의 질문에 대해 라이샹인은 ‘백색 테러 시대를 돌이켜보면 내가 익숙하다기보다, 내가 모르고 무감각해서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은 더 정확하다. 기억을 깨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원하면 그것이 올 것이다. 우리는 바로 초상화 주인공의 연속이다’고 창작 취지를 설명했는데요. 라이샹인은 짙은 하얀 안개에 들어가 하얀색으로 하얀 시대를 그렸습니다.

《하얀 초상화》는 단편소설 3편으로 구성되어 백색 테러 시대를 겪어온 일반인  3명인 칭즈(清治), 원훼이(文惠), 카이스(凱西)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가족을 위해 항상 성실하게 일하는 중학교 교사 칭즈, 어떤 시대에 처하든 늘 우아하게 살아온 가정부 원훼이, 그리고 해외 타이완인의 정치운동을 목격한 본성 지식인 카이스는 모두  정치적 사건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일반 사람입니다. 그들은 그 시대에 처하던 모든 일반인처럼 시국에 관심하다기보다 이러한 시국에 어떻게 버틸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부딪히고, 또 시국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손길을 베풀었습니다. 일반인에 있어서 백색 테러, 이데올로기와 같은 것은 단지 허무한 정치용어에 불과하지만 아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연루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선명한 고통, 심지어 공포가 되어버립니다. 

첫 번째 주인공 칭즈의 사범학교 동창은 당시 신시(新詩)에 푹 빠지고 매우 낭만적이고 재능이 넘쳐나는 사람이었는데 칭즈는 그가 자신과 같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천진난만한 꿈을 버리고 가정을 꾸릴 줄 알았으나, 결국 그는 정신병에 걸려 대낮부터 술에 취한 술꾼이 되었습니다. 그는 특별한 길을 간 것도 아니고 단지 의리를 중시해 무슨 일이든 다 도와주고 불행히 연루되었을 뿐입니다.

백색 테러 시대에 사람들이 늘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서로를 간첩으로 고발하고 온 사회는 스산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바쁜 살림에 점차 늙어가는 칭즈는 우연히 과거 동창이 가장 좋아하는 시를 다시 읽게 되었는데 가슴이 이유없이 설렜습니다. 젊은 시절의 동창을 위로해주는 시가 지금은 자신을 위로하기도 합니다. 동창과 그의 최애 시가 준 힘으로 칭즈는 다시 세상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되고 부인에게 쓴 편지에서 ‘이 시대에 태어난 우리는 모두 불행한 사람이다. 하지만 누구를 원망할 수 있을까? 하나님? 환경? 무엇을 탓하든 아무 소용이 없다. 이 불행한 시대에 태어난 이상 시대가 부여한 어려운 시련을 견뎌야 한다. 당신은 물러설 수 있더라도 다른 사람의 멸시와 조소를 피할 수 있을까? 아니, 당신이 피하고 싶어도 안되는 일은 안된다’고 자신의 의지를 표했습니다.

두 번째 주인공 원훼이는 각양각색의 집에서 가정부로 하숙했는데 일과 무관한 고용주의 사사로운 일에 간섭하지 않은 것은 그의 원칙이자 늘 고용주로부터 인정을 받은 이유입니다. 마지막 고용주가 정치 이슈에 휩쓸렸을 때 원훼이는 선을 넘지 않도록 묵묵히 본분을 지켰습니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기 위해 원훼이는 평생 모은 재산으로 겨우 오래된 집을 구입했으나 결국 무릎 관절의 퇴화로 더 이상 에스컬레이터가 없는 곳에서 살 수 없고 새로운 집을 구하기로 했습니다. 원훼이는 ‘죽음이란 숨이 끊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낙엽이 지는 것은 기껏해야 한 계절이 지나가면 끝나는 일인데 왜 나는 평생이 걸렸을까?’라고 자신의 처지를 탄식했습니다.

마지막 주인공 카이스는 칭즈나 원훼이에 비해 비교적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타이완 최고 학부인 타이완대학교에서 공부하고 결국 유럽에서 정착했습니다. 정치나 시국에 대해 큰 관심이 없던 카이스는 유럽 각국에서 타이완인의 독립운동을 목격했습니다. 백색 테러 시대에 많은 타이완 지식인은 독재정권의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미국이나 유럽으로 갔는데 타이완 본위의 의식이 해외에서 싹이 트는 것도 매우 보편적이었으며 자유중국이라 불리던 중화민국은 자유커녕 기본적 인권조차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많은 유학생과 지식인이 해외에서 타이완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카이스는 바로 이러한 배경 하에 뜻있는 인사를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 중 제가 인상이 가장 깊은 문구가 있는데요. 우선 타이완어로 읽어드리겠습니다.

「哪有可能無感覺?那是你刁故意毋要感覺。
   你有目睭,有頭殼,頭殼毋敢想,身軀敢無感覺?
   毋應該有的限制,就要去改變,若無是欲按怎過生活?
   遇著問題就逃避,是欲作啥物學問?」

어떻게 느낄 수 없어? 그건 네가 일부러 느끼지 않으려고 한 거야.
넌 눈도 있고 머리도 있고 머리를 쓰지 않아도 몸으로 분명히 느낄 수 있잖아.
불합리를 당하면 나서야지, 아니면 어떻게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문제를 만날 때마다 피하기만 하면 무슨 학문을 할 수 있을까?’

이 문구는 당시 자꾸 상아탑으로만 움츠러드던 지식인에 대한 비판입니다. 오늘날에도 전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말이죠? 라이샹인은 스스로의 무식을 인지해 《하얀 초상화》를 창작하듯이 우리도 자신이 밟고 있는 땅에 대해 더 겸손하고 더 많은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백색 테러가 타이완에서 남은 흔적이 여전히 많이 존재하고 있고 《하얀 초상화》를 통해 우리가 당시 사회의 일부 모습을 볼 수 있고 앞으로 더욱 다양한 백색 테러 문학 작품이 등장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포르모사 문학관>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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