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이 불안정했던 ’79, 얻은 교훈은?
- “중”미 단교 vs 미”중” 수교-
-2025.01.06.-타이완ㆍ한반도ㆍ양안관계ㆍ시사평론-
그래도 지구는 둥글다, 지구는 돈다고 한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52년, 이탈리아)는 인류의 상식이나 그 당시 종교를 위시한 권력층에 커다란 충격을 가했는데 21세기 들어 물리적인 여건이 아닌 다른 시각에서 토마스 프리드먼(1953년- , 미국)은 ‘세계는 평평하다’라는 책을 2005년에 내놓고 글로벌화 및 정보기술의 발전은 이 세계를 평평하게 만든다고 말했었다. 모두 다 예언자 같았다. 하나밖에 없는 지구에 사는 우리는 20세기에 수많은 충돌과 전쟁으로 인한 갈등과 증오의 대립을 보아왔다. 2차 대전 이후 지구상에서는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대체로 두 진영으로 나뉘어졌었고, 힘없는 나라는 줄타기를 해야했는데, 구소련(1922년 건국)이 붕괴하고 동유럽 국가들이 각각 독립한 후 신 모스크바정부, 즉 러시아가 새로 탄생했다. 그러나 국제관계에서 동서 양대 진영의 대립 시기와는 달리 러시아는 미국과 군사력 경쟁을 제외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났다. 90년대부터는 미국이 정한 국제질서에 따르는 게 국제 주류가 되었다.
토마스 프리드먼이 책에서 말한 것처럼 세계화로 인해 국제 간은 평평해졌다. 세계무역기구가 1995년에 정식 업무를 시작한 이래 이미 164개 국가가 가입해 있다. 곧 취임할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은 자신이 취임 후에 이것 저것 국제 기구에서부터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는데 그의 1기 집권 때의 행보로도 국제기구 탈퇴나 국제조약 파기 등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이중에 세계화로 미국의 경제가 예전같지 않다고 주장하는 트럼프는 코로나를 겪어서 그런지 세계보건기구까지도 맹비난하며 탈퇴 가능성을 시사했다. 트럼프가 왜 세계화를 반대하는가? 미국 우선주의, 미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시점에서 본다면 세계화 과정에서 가장 이득을 본 국가는 중국, 한국, 타이완, 베트남,,, 등 국가들이다. 생산라인을 인건비를 절약할 수 있는 중국, 인도, 동남아 등지로 이전하고, 인공지능 등의 고급 산업은 미국에 남겨뒀다고는 하나 전반적인 경제발전에 있어 미국은 천천히 조금씩 경제가 쇠락해 가고 중국은 급부상하였으며 한국과 타이완의 경제 또한 고도의 성장을 이뤄냈다. 경제가 발전하는 데에는 여러 조건이 있었겠지만 이중에 ‘세계화’의 공이 아주 크다고 생각된다.
도널드 트럼프 2기 집권을 며칠 앞두고 전 세계가 고민하고 각종 대안을 내놓고 있다. 국제 현실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세계질서는 미국의 표준에 따르고 있다. 그렇기에 작년 한 해 동안 무려 70여 국가에서 중요한 선거가 치러졌는데 모든 국가에서는 미국 대선에 가장 주목했다. 아무래도 미국의 정책과 부수적인 조치들이 각 국가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전반적으로 충격을 받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2025년 들어 첫 번째 월요일 ‘타이완ㆍ한반도ㆍ양안관계ㆍ시사평론’은 미국과 관련한 주제를 다시 가져왔다. 다만 지금의 46대 대통령 바이든이나 차기의 47대 대통령 트럼프가 아닌 작년(2024) 12월29일 100세를 일기로 별세한 제39대 대통령 지미 카터이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별세 소식에 거의 모든 국가들이 애도를 표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방송에서는 지난 12월30일(월) 이 프로그램에서 언급한 것 외에 따로 뉴스 보도가 없었다. 총통부와 외교부에서 관련 성명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표.
1979년 그러면 어떠한 기억으로 남는지? 1949년 국부천도 이래 타이완에서 겪은 가장 큰 위기라고 여겨졌을 만큼 전국이 놀라거나 슬프거나 분노했던 시기였다. 당시 우리는 “중(화민국)미” 단교, “미중(화인민공화국)” 수교로 표제에 달았는데 양안 모두 국가 이름을 뜻하는 가운데/중(中)자를 쓰고 있어 중화인민공화국을 칭할 때에는 따옴표를 씌웠다. 그러다가 1990년대 리덩후이(李登輝) 총통 시기 타이완 토착화를 적극 추진하며 국제상에서 ‘중화민국’보다 ‘타이완’을 더 많이 사용하며 지금은 거의 다 ‘타이완’이란 이름으로 말하게 되었다.
100세의 고령으로 잠든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1979년1월1일 ‘중화민국-미국’ 단교와 ‘미국-중화인민공화국’ 수교의 주역이자 미 연방 국회에서 수 차례 내용을 수정한 버전으로 1979년4월 공포한 ‘타이완관계법’은 우리와 지미 카터 간에 가장 직접적인 사건이다. 이 외에 단교 20년 후인 1999년, 리덩후이 집정 시기에 국책연구원의 초청으로 타이완을 방문하여 연설을 한 지미 카터가 당시 뤼슈리엔(呂秀蓮) 타오위안현 현장(縣長)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는지 우리는 뚜렷히 기억한다.
친미 국가라면 지미 카터의 별세에 애도를 표하고 그의 업적을 되새기겠지만 타이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에 이유가 있다. 바로 단교 사태이다.
20세기 70년대말에서 80년대 초반의 타이완은 시국이 매우 불안정하였다. 60대 이상이라면 단교 사태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지미 카터라는 이름에 호감이 가지도 않을 것이다.
79년 양안과 각각 단교와 수교를 한 미국 카터 행정부는 미국이 서둘러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를 하게 된 것은 미국-중화인민공화국 수교는 중국과 이웃국가들과의 긴장관계를 완화할 수 있고 중국대륙의 인권 상황을 개선할 수 있으며, 지정학적으로 소련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전략에 기인한 것이다. 물론 지금 다시 검토할 경우 이 모든 외교전략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1974년에 사임한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것을 그대로 뒤따랐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미국은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어떠한 대통령이 집권을 하든 국가정책은 영원히 ‘미국 이익 우선’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것도 지미 카터 행정부 시대 단교의 충격을 맞은 중화민국이 잊어서는 안 될 교훈이다.
1999년, 리덩후이 총통 시대에 미국 제39대 대통령을 역임한 지미 카터가 국책연구원의 초청으로 타이완을 방문해 공개 연설을 발표했다. 연설 후 질의응답 시간에 현장의 청중 신분의 당시 지자체장이 질문할 기회를 얻었다. 바로 당시 타오위안현의 현장 뤼슈리엔이었다. 뤼슈리엔은 그 다음해(2000년)의 대선에서 민주진보당 소속 천수이볜(陳水扁)의 러닝 메이트로 참선했고 여성인권에 앞장섰던 정치인이다.
뤼슈리엔은 지미 카터에게 “각하께서 인권과 민주를 부단히 말씀하시고 계신데 타이완 인민은 이(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교 / 중화민국과의 단교) 때문에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른지 아십니까? ….., “, 그러면서 “타이완에 대해 사과해야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이에 지미 카터는 “나는 이 때문에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
필자는 국책연구원를 비롯한 유수의 싱크탱크가 주최하는 국제와 양안 관련 학술 세미나에 자주 참석해 취재를 하고 있다. 만약 1999년 지미 카터의 연설 현장에 나갈 수 있었다면, 그래서 필자라면 어떠한 질문을 했을까 사고하게 된다. 국제 외교에서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임을 미국은 상기시켜줬다. -白兆美
원고 ㆍ보도: 백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