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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ti 중앙방송국Rti 중앙방송국타이완.한반도.양안관계-2021.11.15.-중공의 '역사 결의' 분석

  • 2021.11.15
臺韓. 在臺灣한인사회. 한반도 및 양안관계
시진핑(習近平). -사진: Reuters / TPG Images

타이완.한반도.양안관계-2021.11.15.-중공의 '역사 결의' 분석

올해 2021년은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는 해이다. 6년 후인 2027년은 중국 인민해방군 건군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백년’이라는 명사 자체는 거창한 느낌을 주게 마련이며 인물이나 사건 모든 면에서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11월8일부터 11일까지 나흘 간 중국공산당 제19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약칭 6중 전회)가 열렸다. 이 기간 우리가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역사 결의’이다. 중국공산당 창당 100년 동안 이번으로 3번째 채택하는 ‘역사 결의’이며, 첫 번째는 1945년 중국국민당 집정 시기에 마오저둥(모택동-毛澤東)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이 당내 반대파들을 몰아내는 숙청에 적용한 결의였고, 두 번째는 1981년 개혁개방과 중국식 사회주의 경제를 발전하고 있었던 덩샤오핑(등소평-鄧小平) 시대에 채택한 역사 결의였다.

이번 중공의 6중 전회에서는 시진핑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하고 그의 장기 집권을 고하는 내용이 담겼다고 본다. 이례적인 건 전문이 공개되지 않았고, 7천 자에 달하는 공보가 발표되었다.

우선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역사 결의의 중점을 요약해보겠다.

1945년의 역사 결의에서는 (공산당)당내 교조(教條)주의를 몰아내며 마오저둥의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化)’ 사상 노선을 수립하고 그의 핵심적 지위를 공고히했다. 그 당시 장제스(장개석-蔣介石/蔣中正)의 중국국민당이 집권을 하고 있었는데, 공산당 역사 결의에는 ‘국민당’이라는 단어가 18번 들어갔고, 국민정부는 ‘반동’정부라고 규정하며 공산당 토벌은 ‘학살’정책이라고 비난하면서 중국국민당의 일당전제정권을 반대하고 민주주의연립정부 성립을 주장했었다.

만약 현실적인 결론을 먼저 본다면, 일당전제정권을 반대한다고 부르짖던 중국공산당은 더 심한 일당 독제 정권이 되어 있다.

국공내전의 정권 다툼에서 중국국민당이 패하며 타이완으로 일단 후퇴해 지금은 타이완에 정착한 중화민국, 또는 타이완이라 불리는 정부가 되었다. 1949년 중국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의 신중국을 건국했다. 그후부터 마오저둥은 ‘타이완 해방’을 그와 공산당의 역사적 사명으로 내세웠다.

1981년의 역사 결의에서는 1966년에서 1976년 사이 중국대륙에서 전개되었던 인류 역사상 극히 비참했던 문화대혁명에 대한 비판을 내놓았다. 당시 권력을 손에 쥔 사람은 바로 덩샤오핑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의 상징 인물이 된 덩샤오핑은 본래 마오저둥이 후계자로 지명해 집권했던 화궈펑(화국봉-華國鋒)과 그의 무리들을 공산당 내 개혁파에 속하는 후야오방(호요방-胡耀邦), 쟈오즈양(조자양-趙紫陽), 완리(만리-萬里) 등으로 물갈이를 했다. 그러면서 개혁개방의 현대화 건설이라는 목표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타이완’이라는 명사가 역사 결의에 등장하게 된다. 중국공산당이 집정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이래 ‘타이완’을 제외하고 이미 국가통일을 이뤘다고 언급했다. 결의에는 또한 ‘타이완이 조국의 품으로 돌아와 조국통일 대업을 실현한다’는 목표를 설정하면서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 건설을 목적으로 삼았다. 시진핑을 말할 때 ‘강국론’을 연상하게 한다. 그런데 덩샤오핑 시대에 이미 강국론을 제시했었다.

덩샤오핑 시대의 역사 결의에서는 ‘중국국민당’이라는 명사는 11번 제기됐다. 마오저둥의 역사 결의에서 18번 출현한 것보다는 적다. 역사 결의에서 1927년 장제스와 왕징웨이(왕정위-汪精衛)의 중국국민당은 숭칭링(송경령-宋慶齡)을 위시한 국민당 좌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부 순원(손문-孫文/孫中山)이 결정한 ‘국공합작정책’을 배반하고 제국주의와 결탁하며 공산당 당원과 혁명 인사들을 잔혹하게 학살했다고 비판했다.

이 역사 결의에서는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펼친 ‘해방’전쟁을 통해 장제스의 8백만 군대를 소멸하며 국민당 반동 정권을 타도하고 위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했다는 글이 들어가 있다. 또한 이중에 중점적인 한 마디가 있는데 바로 ‘중국인민은 일어났다’이다.

덩샤오핑시대에 중화민국은 미국을 잃었다. 1972년 마오저둥이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과 만난 후 6년여 뒤에 중공과 미국이 정식 국교를 맺었다. 중공이 미국과 수교한 1979년, 덩샤오핑은 신년 연설에서 4개의 현대화(공업현대화, 농업현대화, 국방현대화, 과학기술현대화), 중(공)미 관계정상화, 타이완의 귀환을 업무 일정에 편성한다는 3대 주요 목표를 제시했다.

당시 덩샤오핑은 경제 발전에 치력하면서 양안간의 통일을 이뤄내고자 했다. 타이완은 지정학적, 전략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에게 있어서 타이완이 귀환하지 않으면 국공내전은 종식될 수 없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중공은 타이완이 제국주의가 중국을 분할시킨 산물로 간주하기도 한다.

또한 덩샤오핑은 역사 결의에서 마오저둥의 대약진, 반우(反右)운동, 문화대혁명을 철저히 부정했다. 하지만 마오저둥의 사상을 확립했다. 즉 마오저둥이 만년에 범한 착오들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판을 했지만 마오저둥이 수립한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 사상 노선은 높이 평가를 했다.

마오저둥은 타이완을 해방하겠다고 했다. 덩샤오핑은 1979년 ‘해방’이란 글 대신 평화 통일을 하겠다고 밝히며 양안간 ‘3통(通)과 4류(流)’를 제시했다. 3통은 통우(通郵-우편물 왕래), 통상(通商-상업 교류), 통항(通航-교통 개설)이며, 4류는 문화,체육,학술,과학기술의 4가지 교류를 뜻한다.

당시 덩샤오핑은 이런 말을 했다. ‘만약 타이완이 중국대륙으로 귀환을 한다면, 타이완의 현상을 존중하고, 사회제도는 100년 불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청천백일기는 하강해야 하지만 군대는 보유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결론부터 말한다면 홍콩의 상황을 보면 금방 이해를 할 수 있다. 중공이 일국양제를 홍콩에 적용했지만, 50년 불변한다는 홍콩의 체제는 이미 베이징이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1979년 덩샤오핑의 유화정책적 발언에 대해 타이베이의 중화민국 총통 장징궈(장경국-蔣經國)는 상당한 압력을 받았다. 덩샤오핑이 실리적인 노선을 걷겠다고 주장하고,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였다는 이미지로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타이완에 대해 이른바 평화통일전선을 제시하자 장징궈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장징궈 일기는 지금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후버연구소에 소장되어 있음) “(평화통일이라는) 이러한 수단은 전쟁보다 더 악독하다”라고 그의 일기에 적었다. 장징궈의 두려움이 그대로 보이는 문구이다. 사실 장징궈는 이어 ‘3불정책-三不政策’으로 덩샤오핑의 ‘3통(通)과 4류(流)’/‘평화통일전선’을 일축했다. (3불정책이란 불접촉, 불담판, 불타협을 말한다)

2021년 시진핑의 역사 결의는 아직 전문이 공개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공보의 내용을 근거로 한다면 기회주의적인 면이 엿보이며, 시진핑의 장기집권과 마오저둥화(化)에 방점을 둔 듯하다.

이 외에 타이완에 관해서는 ‘하나의 중국 원칙과 92년 합의九二共識를 견지하며, 타이완독립 분열행각을 견결히 반대하고, 외부 세력의 간섭을 견결히 반대하며, 양안관계의 주도권과 주동권을 굳게 장악한다’는 내용이 역사 결의에 들어가 있다.

중국공산당이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지 이러한 역사 결의에서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중공에게 있어서 타이완의 귀환이야말로 중국의 근대사, 100년 역사 속의 치욕을 떨쳐내고, 새로이 다음의 100년을 기약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타이완이 귀환되어야 하는지 타이완의 중화민국 국민을 먼저 설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白兆美

원고. 보도: 백조미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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