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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ti 중앙방송국Rti 중앙방송국臺韓. 在臺灣한인사회. 한반도 및 양안관계 - 2021-08-23

  • 2021.08.23
臺韓. 在臺灣한인사회. 한반도 및 양안관계
황금.

2021.08.23.-타이완.한반도.양안관계-고국을 떠난 국가 원수들

현재 타이완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몇 가지 중에는 1949년 장제스(蔣介石) 정권이 국공내전에서 밀려나 타이완으로 임시 천도하면서 가지고 온 것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도 당시 장제스가 그 난국에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게 불행중 다행이었고, 비록 패배한 장수이지만 슬기로운 판단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국가 원수가 해외로 망명하는 예는 여럿 있는데 장제스는 망명의 길을 걷지 않고 본토수복의 염원을 안고 타이완에서 타계했다.

  • 프가니스탄, 베트남, 필리핀 그리고 타이완

 –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다

70여 년 전의 일을 회고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정권이 탈레반에 넘어간 사건은 전세계가 주목하는 정치.군사와 외교 사건이다. 8월15일 탈레반이 수도 카불에 입성할 때 아슈라프 가니(Ashraf Ghani)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은 이미 거금을 챙겨 도주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가의 원수가 나라와 국민을 지킬 생각은 없고 자기 잇속만 챙겼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드높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철수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본 사람들 대부분이 베트남을 상기했다. 베트남이 완전히 공산 정권이 되기 전 마지막 대통령을 지냈던 구엔 반 티우(阮文紹, Nguyen Van Thieu) 대통령도 수도가 함락되기 직전 국가 원수의 자리를 버리고 탈출했다. 1975년 내전에서 패해 거금을 가지고 해외로 망명했는데 당시 우선 타이완에 머물렀었다. 2001년에 미국 보스턴에서 사망한 구엔 반 티우는 베트남 현대사에서 망국의 죄인이자 부정부패로 인해 상당한 비난을 받았었다.

아시아에서 국가 원수가 해외로 망명하는 예는 더 있다. 이중에 역시 부정부패와 피폐한 경제로 그당시 원래 기타 아시아 국가에 비해 잘사는 나라로 인식되었던 필리핀의 발전을 후퇴시킨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Marcos) 대통령이다. 그의 부인 이멜다 마르코스(Imelda Marcos)의 사치에 대해서도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다. 마르코스 대통령의 재산도 엄청나다. 자신 가족과 친인척들의 욕심만 챙긴 사람이라 할 수 있다.

  • 장제스는 가니, 마르코스, 구엔반티우와 무엇이 달랐나?

이렇게 아시아의 아프가니스탄, 베트남, 필리핀의 전 국가 원수들이 각자의 사정으로 해외로 나간 사실을 열거했는데, 오늘은 장제스에 대해서 얘기하고자 한다.

고국을 떠났다는 사실은 다 같지만 그 결과는 다소 다르다.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중국대륙에서 8년의 고전 끝에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겨우 한숨을 돌릴 무렵 공산당이 이미 힘을 키워 정권 다툼을 벌이며 동포 형제 간의 살육 내전이 터졌다. 1948년에 이르러 장제스는 공산당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아지트를 모색했다. 오늘은 국공내전의 상황은 생략하고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건너올 때 가지고 나온 것을 조명해 보겠다.

타이완을 방문했던 한국인들도 타이베이의 국립고궁박물원을 가봤거나 들어봤다. 박물원 소장 유물은 1949년 이후 타이완에서 기증 받거나 새로 구입한 것을 제외하고 전부 장제스의 명령으로 가져온 보물이다. 돈으로 계산이 되지 않는 유물들이 수백수천을 훨씬 넘는다. 하지만 그는 그의 주머니에 유물들을 담지 않았고 심지어 독재 철인 정권 시대에 타인이 장제스에게 선물한 고대 문물은 전부 나라에 기증할 정도였다. 그는 죽을 때에도 부동산이나 기타 재산이 없었다. 엄청난 금괴를 가지고 온 것은 사실이지만 나라에 사용했지 개인의 주머니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아들 장징궈(蔣經國)가 정계에 입문한 것은 장제스가 키운 것이지만 그의 손자나 증손들 모두 정치계에 발을 딛지 않았고 재산을 물려받을 만한 걸 후손들에게 남겨주지 않았다. 장제스는 본토수복을 하지 못한 한을 품고 1975년 타이베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장제스는 돈으로 계산하기 힘든 수많은 유물과, 금괴를 가지고 타이완에 왔다. 타이완을 본토수복을 위한 부흥기지로 삼으며 다른 나라로 망명하지는 않았다. 그가 가져온 유물과 금괴 외에 또 한 가지 높은 가치의 ‘이것’이 있다. 바로 ‘인재’였다. 우수한 인재들이 없었다면 타이완은 지금의 타이완으로 발전하기까지 더 오랜 세월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1948년11월말, 대륙에서 쉬방회전(화이하이전투)이 벌어지고 있을 때 국민정부는 이미 싸움에서 질 것이라 판단하고 곧바로 수도 난징(南京)에 소재한 중앙은행(1928년11월1일 설립)에서 200만 냥의 황금을 타이완으로 보냈다. 국공 간의 회전이 1948년11월에 끝나지 않고 1949년1월까지 지속되었는데 전쟁을 한 달여 더 끌고 있을 때 장제스정부는 중앙은행의 황금을 더 타이완으로 실어날랐다. 앞뒤로 총 400만 냥이 넘는 규모의 황금이 타이완으로 옮겨졌다.

전쟁 중에 자금 조달에 있어 황금보다 더 쓸모있는 건 없을 것이다. 당시 육해공군이 전쟁에 필요로하는 물자로 사용한 황금은 근300만 냥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1950년6월 타이완으로 옮겨온 남은 황금을 전수 국고에 반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타이완은행(타이완으로 천도한 이래 처음에는 중앙은행의 일부 업무를 타이완은행이 대행하였고, 2000년도에 이르러 마지막 대행 업무인 중화민국 화폐 발행 업무를 타이완은행에서 중앙은행으로 회복시켰다. 그래서 2000년도 이전의 화폐에는 타이완은행 발행이라 되어있고, 그 이후의 것은 중앙은행 발행이라 표기되어 있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국고에 반납된 황금은 108만 냥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경제가 매우 피폐해져 있었고 물가 폭등과 엄청난 통화팽창을 초래하여 본래의 ‘타이완달러(臺幣-TWD)’를 ‘뉴타이완달러(新臺幣-NTD)’로 대체하는 새로운 화폐정책을 펼쳤다. 그때 준비해 놓은 이 황금이 있어서 경제난을 버텨낼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만약 국공 내전 때 중앙은행의 황금을 타이완으로 가져오지 않았더라면 타이완이 적화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을지 자신 있게 말하기 힘들다.

  • 유물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사진: jennifer pai)

청나라 왕조가 멸망하고 1912년1월1일 공화국인 중화민국이 건국되었다. 원래 베이징의 청나라 황궁 자금성에는 여전히 마지막 황제 푸이(愛新覺羅.溥儀)가 살고 있었는데 1924년 10월 펑위샹(馮玉祥)이 이끄는 군대의 위협으로 푸이가 궁에서 쫓겨난 후 국민정부는 자금성을 비롯한 고궁 유물들을 기록 정리하였고, 그 다음해(1925년) 국경일(10월10일) 자금성의 일각을 ‘고궁박물원’이란 간판을 내걸고 사회대중에 개방하였다. 이로써 일반 시민도 황궁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고, 황실 유물을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국공 내전 후반에 장제스 측의 상황은 아무리 어려워도 국가의 주요 유물들을 타이완으로 옮길 것을 계획하고 중요 문물 중에서도 최고의 유물을 골라서 안전한 곳으로 가져가도록 전문가에게 맡겼다.

일본이 중국대륙을 탐내며 각종 구실로 누차 중국을 침범했다. 그때 자금성 등 여러 곳에 있는 주요 유물들이 일본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고고학,역사,미술 등 관련 분야의 학자. 전문가들이 중요 유물을 골라 후방으로 유물의 피란길에 나섰다. 유물이 깨지지 않도록 잘 보관하고 이동하는 데에는 이미 능숙해져 있었다.

타이완으로 건너온 유물은 비단 자금성에 있었던 왕중왕 뿐 아니라 중앙도서관, 중앙연구원, 외교문서 등 국가의 존속과 문화의 계승을 상징하는 문물들이 상당수에 달했다. 1948년12월22일부터 총 3차례에 걸쳐 운반해 왔는데, 이중 현재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된 당시 가져온 문물은 근70만 점이다. 그림 한 점에 현재 국제경매장에서 미화 1억불을 호가하는 것도 수십 점이 넘는다. 이 세상에서 단 한 점밖에 없는 유물도 여럿 있다. 그 외에 중요한 외교 조약 문서, 중국 명나라 이전의 소중한 도서들, 3천 년이 넘는 갑골문과 청동 유물 등등은 문화의 상징으로도 충분한 유물들이다.

수천 년의 문화 유산을 타이완에 가져왔기에 타이완은 오늘날 중화문화의 정통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인재

외성인(1945년 이후 타이완으로 건너온 중국대륙 각 지방 출신 사람들)의 대규모 타이완 이동은 1949년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중국대륙에서 철수하면서 실시되었다. 당시 함께 온 사람의 수는 약130만 명이다. 그 때 타이완으로 오려면 통행증과 유사한 증명을 소지해야만 가능했다.  국군을 제외하고 주로 학자, 교사, 공무원, 지방정부의 문관, 지식인,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증명을 발급했는데 약 30만 명이 넘는 숫자였다. 그중에서도 문인, 작가, 대학교수들이 많았다. 그 시기 타이완의 고등교육 학부로는 지금의 국립타이완대학교를 비롯해 타이중(臺中)농업학교(현 국립중흥中興대학교), 타이난(臺南)공업학교(현 국립성공成功대학교) 등이었다. 전쟁 중에 피란 온 지식인들은 생계를 위해 일단 교직을 지원하게 된다. 따라서 고급 지식인력들은 당시 타이완 각지의 사범학교, 중고등학교 및 일부 초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이들 인재들은 이곳에서 수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을 양성하는 데 큰몫을 담당했다.

장제스는 군대를 이끌고 왔지만 더 중요한 각 분야의 인재들이 모일 수 있도록 안배했다. 장기간 동안의 계엄과 독재로 정치민주화 이후 장제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은 건 사실이지만 국공내전에서 참패하고 동란과 시국이 위급함에도 불구하고 다시 돌아간다는 굳은 결심으로 타이완을 부흥기지로 하여 재건하며 발전시켰다. 이런 점에서 장제스를 평가한다면 최근 아프가니스탄의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 필리핀의 페르디난 마르코스 대통령, 베트남의 구엔 반 티우 대통령과는 확연히 다르다. –jennifer pai

원고.보도: 백조미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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