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ti 중앙방송국Rti 중앙방송국臺韓. 在臺灣한인사회. 한반도 및 양안관계 - 2021-06-28

  • 2021.06.28
臺韓. 在臺灣한인사회. 한반도 및 양안관계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사진: Reuters / TPG Image

臺韓. 在臺灣한인사회. 한반도 및 양안관계 - 2021-06-28

중공 창당 100주년 회고-20210628

100이라는 숫자는 크고 많고 완벽하다는 느낌을 준다. 보통 시험 점수를 100점을 만점으로 하고 있고, 옛날에 100살까지 장수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반세기 전까지만 했어도 100만장자라는 꿈을 꾸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올해 타이완해협 저쪽의 중공에서도 100주년이라는 날을 맞게 된다. 2021년7월1일은 바로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는 날이다. 우리가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축하해줄 입장은 아니다. 그렇지만 오늘 ‘타이완.한반도.양안관계’에서는 중공 창당 100주년과 관련해 말씀드린다.

공산당을 말할 때 러시아를 빼놓을 수는 없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체제에 변화가 생겼다. 2년 후 중국에서는 1919년 5월4일 54운동이 일어났다. 외국의 침략을 막으며 나라를 지키겠다는 주장이 전국적으로 들끓었다. 그러면서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성행하기 시작했고, 그때 바로 제3 인터네셔널(공산국제 또는 공산주의자 국제조직 또는 공산주의 인터네셔널로도 불림)의 지도와 지원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1921년 ‘중국공산당’이 발족됐다.

약칭 소련으로 불렸던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1922년에 건국됐고, 중화민국 국부 순원(손문 선생)은 1923년 연아용공(聯俄容共-러시아와 협력하고 중국공산당을 용인한다는 뜻으로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 간의 제1차 국공합작을 의미함)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2년 후 1925년 순원이 타계한 후 중국국민당 내부 갈등이 심했는데 특히 공산당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반공사상을 고수할 것인가를 놓고 중국국민당 내부에서는 의견을 도출시키지 못했다. 이때 중국공산당은 우한(武漢)에서 독립하기로 결정했고 또 2년 후인 1927년에는 북벌전쟁으로 바빴던 장제스(蔣介石)는 나중에 일본과 손잡은 왕징웨이(汪精衛)와 급기야 결렬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 양당은 장기간의 투쟁을 계속하게 됐다. 부연 설명을 드리자면 1927년 당시의 중화민국 집권 국민정부를 수립했는데 중국국민당 내부는 또 수도 난징(南京)은 장제스를 위시한 공산당 청산 세력이었고, 후베이성(湖北省) 우한에는 왕징웨이를 위시한 공산당을 용인하는 세력이 있었는데, 공산당을 받아들이는지 여부를 놓고 난징과 우한, 장제스와 왕징웨이 간의 권력 다툼이 있었고 결국 중국국민당은 분열되고 말았다.

집권 중국국민당 내부의 분열로 중국공산당의 세력은 신속하게 확장되었는데 당시 각 지방에 ‘중화 소비에트’를 성립해 중화민국이 마치 하나의 국가에 두 개의 체제가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1930년 중국국민당은 공산당 토벌에 나섰다. 5년 후인 1935년 공산당이 밀려나면서 대장정을 시작하여 산시성(陝西省) 옌안(延安)으로 물러나 한숨 돌릴 기회를 얻었다. 공산당 마오저둥(毛澤東)은 구이저우성(貴州省) 준이(遵義)에서 그의 권력을 다지고 있었고, 국민당 장제스는 안내양외(安內攘外-국내에서는 공산당을 토벌하고 대외적으로는 일본군을 물리친다라는 뜻)로 편할 겨를이 없었다.

이듬 해에 독일과 일본이 손을 잡고 소련 멸공을 하자는 반공협정을 체결하고 시베리아에서 회동하고자 했다. 1936년11월의 일이다. 같은 해 12월 중국 현대사에서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의 운명을 바꿔놓은 ‘서안사변’이 일어났다. 서안사변이라고 하면 장제스, 숭메이링(宋美齡), 장쉐량(張學良), 저우엔라이(周恩來) 등 교과서에서도 배웠던 이름들이 연상될 것이다.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일본군의 침입으로 정면전쟁을 8년씩이나 했다. 1945년 원자탄이 일본 땅에 떨어지면서 일본이 투항했지만 또다시 국공내전이 벌어져 1949년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정부는 타이완으로 밀려났고, 그 해 시월 중국공산당 집권의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을 하여 타이베이와 베이징에서 각각 다른 체제의 국가로 72년째 대치해오게 된 것이다.

중공이 1949년 건국을 했을 당시 공산당 내부에서 노선 투쟁이 심각했다. 그런 권력 다툼이 심화하면서 불행히도 1966년부터 본격적인 문화혁명의 암흑의 10년을 맞게 되었고, 여하튼 마오저둥이 실권을 손에 쥐는 데 성공했다.

예전에는 동서양대집단이라고 해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첨예한 대치로 인해서 상호 간의 국가와는 교류를 할 수가 없었다. 예전의 여권에는 사회주의 국가, 공산주의 국가의 출입을 금지하는 문구가 있을 정도였다.

20세기 후반, 국제사회의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 반공을 고수하는 국가들이 공산 국가들과 화해하며 수교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중국과 핑퐁외교를 펼친 건 영화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 1994년)’에서도 패러디하였다. 미국이 중국의 손을 잡아준 후 1971년 유엔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상임이사국의 대표권을 중화민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1979년 중화민국은 국제사회에서 더 고립되게 되었다. 미국과 중공이 수교를 했기 때문이다.

중국 베이징에서 1989년 6월4일 티엔안먼(天安門)사태가 폭발해 전세계의 이목이 중국에 집중되었었다. 국제사회에서 중국에 대해 금수조치를 취했는데, 중공은 내부의 순회 담화를 전개하며 발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97년에는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이관됐고, 20세기를 보내기 전인 1999년 마카오는 포르투갈에서 중국으로 이관됐다. 또한 2001년에는 양안간이 동시에 세계무역기구의 회원이 되었는데 그해 9월11일 911테러 사태가 터졌다.

중공은 계속 커져가고만 있었는데, 2010년도에는 이미 덩치가 너무 커져서 세계 제2대 경제체로 부상했고, 일대일로로 중국몽을 세계에 전파하는 야심을 드러냈다. 최근 수년 이래 국제사회, 특히 미국은 이에 당황하며 중국에 대한 포위전략과 인권 이슈로 억누르려 하고 있다.

2012년 시진핑(習近平)이 중공의 최고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집권 장기화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대내적으로는 부정부패를 타격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시진핑의 1인 독재를 유지하며 대외적으로는 경제원조 등으로 중국몽을 키워나가고 있다.

아주 짧은 문장으로 중국공산당의 100년을 회고해 봤다. 7월1일 창당 100주년이다. 중화민국의 양안사무 주무기관 행정원 대륙위원회는 지난 금요일(6월25일)에 서면 형식으로 제시한 내용을 끝으로 오늘 ‘타이완.한반도.양안관계’ 시간을 마치도록 하겠다.

대륙위원회는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아 현재 대륙에 체류 중인 100여 명의 타이완인들이 기념식에 초청되었다고 들었는데,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현직공직자 및 퇴직 공무원은 여전히 중국대륙 입국 통제대상이며 해당 기념식 참가를 금지한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우리 정부는 ‘국가보안법’이 있음을 환기시켰다. –jennifer pai

원고.보도: 백조미

엔딩 음악: <속세의 연>

프로그램 진행자

관련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