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현지시간 3월 12일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양쯔충(양자경)을 중심으로 동양계 배우들이 주조연을 맡은 미국 SF, 액션, 코미디 영화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작품상을 비롯해 7관왕을 휩쓸며 세계 영화사에 기념비적인 역사를 써냈습니다. 특히 말레이시아 화교 출신 배우 양즈충이 아시아계 배우 처음으로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기록을 세우게 되면서 앞으로 아시아계 배우들에 대한 관심이 더욱 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은 할리우드 영화에 아시아계 배우가 출연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며, 작년 아카데미상의 최다 수상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SF서사영화 ‘듄’에도 아시아계 배우가 출연했는데, 이 아시아계 배우는 바로 리안(李安) 감독의 영화 ‘와호장룡(臥虎藏龍)’, 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의 ‘해피투게더(春光乍洩)’, 허우샤오시엔(侯孝賢) 감독의 '쓰리 타임즈(最好的時光)' 등 영화로 한국에서도 꽤 높은 인지도를 누리고 있는 타이완 출신 남배우 장전(張震)입니다.
연기경력 30년의 베테랑 배우 장전은 14살 때 타이완 뉴웨이브 거장인 양더창(楊德昌) 감독이 연출을 맡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牯嶺街少年殺人事件)'을 통해 연기계에 발을 들였습니다. 그는 영화에서 가족, 우정, 사랑, 폭력 등 여러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안해하고 방황하는 소년 샤오스(小四) 역을 연기했는데, 당시 14살 밖에 안됐던 장전은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뛰어난 연기를 선보이며 같이 영화에 출연한 친아버지 장궈주(張國柱)와 공동으로 타이완 최고 권위의 영화시상식인 제287회 금마장(金馬獎)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게 됐습니다. 이로서 장전은 아직까지도 금마장 남우주연상 최연소 후보(15살)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포스터 - 사진: 위키백과
이후 장전은 왕자웨이, 허우샤오시엔, 톈좡좡(田壯壯), 우위선(吳宇森) 감독 등의 작품에 꾸준히 출연하면서 인지도와 커리어를 쌓여나갔습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 이어 ‘쓰리 타임즈’와 ‘수춘도(繡春刀)’를 통해서도 금마장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은 하지 못했고, 2021년에 제58회 금마장 시상식에서 1991년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으로 첫 남우주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된 지 30년 이후 4번째 노미네이트 만에 드디어 ‘영혼 사냥(緝魂)’으로 남우주연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영혼 사냥은 한 거대기업 회장이 자택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 후 장전이 연기한 검사 남편과 경찰 아내가 수사에 나서고, 그들은 수사 과정에서 하나씩 단서를 찾게 되면서 살인사건 뒤에 숨겨진 놀라운 비밀이 점차 드러나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영혼 사냥은 중국 SF소설가 쟝보(江波)의 ‘영혼이식술(移魂有術)’을 영화한 것으로, 소설에서는 생명과학의 성과와 한계를 주로 다루지만, 영화에서는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과 살인사건에 대한 추리 과정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장전은 영화에서 암에 걸린 검사를 연기했는데, 그 캐릭터를 잘 표현하기 위해 12킬로그램이나 감량하고 삭발도 했습니다.
장전이 영화 '영혼 사냥'으로 금마장 남우주연상의 영예를 안았다. - 사진: 타이베이금마장영화제집행위원회 제공
영혼 사냥으로 첫 금마장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지 1년 뒤인 2022년 9월에 장전이 조연으로 출연한 한국 드라마 ‘수리남’이 넷플릭스에 공개됐습니다. 수리남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6부작 시리즈로, 남미 국가 수리남을 장악한 한국 마약 대부와 그를 잡기 위해 정부 비밀 작전에 협조할 수밖에 없는 민간인 사업가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이 드라마는 하정우·황정민·박해수·조우진·유연석 등 한국의 정상급 배우들과 타이완 실력파 배우 장전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캐스팅부터 화제를 모았고, 9월 셋째 주(12~18일) 시청 시간 6265만 시간을 기록하며 비영어권 드라마 부문 1위를 차지했습니다. 드라마에서 악명 높은 조직의 수장을 연기한 장전은 강렬한 악당 이미지를 주기 위해 매번 2시간 정도 문신 분장과 짙은 피부색 분장을 했다고 합니다. 이 드라마의 연출을 맡은 윤종빈 감독은 예전부터 장전의 팬이었고, 그의 출연을 위해 직접 타이완까지 와서 그를 열심히 설득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장전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한국 드라마 ‘수리남'에 출연했다. - 사진: 넷플릭스 제공 via CNA
이 드라마를 통해서 장전과 하정우는 16년 만에 다시 같은 작품에서 만나게 됐습니다. 그들의 인연은 2007년에 영화 ‘숨’에서 시작됐습니다. 숨은 2020년 코로나19로 별세한 김기덕 감독이 장전을 너무 좋아해서 그를 위해 특별히 만든 영화로, 영화는 죽음을 앞둔 사형수와 남편의 배신으로 숨이 막혀가는 여인이 교도소라는 공간에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입니다. 장전은 영화에서 사형을 선고받고도 스스로 죽음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형수를 연기했습니다. 그는 날카로운 송곳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을 시도하나, 결국 실패하고 목소리만 잃은 채 다시 교도소로 돌아오는데, 생에 미련은 아무것도 없는 그는 자신을 찾아온 여자와 4계절의 시간을 나누며 생의 마지막을 보냅니다. 장전은 영화에서 대사 한마디도 없지만, 눈빛과 몸짓으로 흡인력 있는 연기를 선보이며 백마디 말보다 진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사진: 다음영화
한편, 이 영화의 여주인공을 맡은 배우 박지아는 요즘 인기작인 '더 글로리’에서 역대급 빌런 연기를 펼치며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찍은 가운데, 박지아와 장전이 함께 호흡을 맞춘 영화인 숨은 타이완에서 다시 화제가 됐습니다. 박지아 배우가 두 작품에서 전혀 다른 인물 연기를 선사했으니, “같은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타이완 팬들이 매우 많습니다.
하지만 ‘숨’은 장전의 첫 한국 활동이 아닙니다. 그는 타이완 배우이지만 한국과의 인연이 많은 편입니다. 그는 2001년 한국의 2인조 R&B 그룹인 브라운 아이즈의 ‘벌써 일년’ 뮤직비디오에 출연해 인지도를 높였습니다. 이 뮤직비디오는 배우 장전, 김현주, 이범수가 출연하고 당시 국내 최고 인기 감독이던 차은택이 연출했으며, 영화감독 왕자웨이(王家衛)가 편집을 맡기도 했습니다.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영상미와 국내외 유명 스타들의 등장으로 이 뮤직비디오는 당시 큰 화제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벌써 일년’은 다음 해인 2002년에는 타이완 가수 쉬훼이신(許慧欣)의 ‘사랑의 항체(愛情抗體)’로 번언됐습니다.
데뷔작부터 뛰어난 연기력으로 금마장 남우주연상 최연소 후보를 기록했고, 이제 금마장 남우주연상도 거머쥐고 할리우드까지 진출하게 된 장전은 앞으로도 어떤 장르의 작품에서 30년차 배우로서의 탄탄한 연기를 선보일지 무척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