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가곡의 선율이 흐르는 영화 <비정성시>

  • 2021.04.21
수요 산책
영화 '비정성시' 촬영 당시 허우 샤오 셴(왼)감독과 배우 양조위. [사진=CNA]

수요산책시간입니다~

흔히 ‘좋은 영화에는 좋은 음악이 따른다’라고합니다… 카페나 길거리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면 조건반사처럼  영화 속 인상 깊었던 장면들이 생각나는 곡들 하나씩은 가지고 있지 않으신가요?

저는 굳이 후렴구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이 첫 소절부터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는 낭망의 끝판왕을 찍는 노래 'Reality(리얼리티)'가 생각나는데요.

프랑스 영화 <라붐> 속 쿵쾅거리는 디스코 음악에 흠뻑 취해있는 친구들 틈에서 남자주인공 매튜가 여자주인공 빅에게 헤드폰을 씌워주자 놀라는 여자주인공 소피 마르소의 표정.  시끌벅적한 소음들 속에서 리처드 샌더슨의 꿀성대로 부른 ‘리얼리티’가 흘러나오고…사랑에 빠져버린 소년과 소녀의 모습을 담은 영화 <라붐> 속 ‘헤드폰 신’은 영화사에 길이길이 남는 로맨스 명장면이 됐습니다.

소란스런 길거리나 투박한 장소에서 리처드 샌더슨이 부른 이 달달한 ‘리얼리티’가 흘러나올때면 책받침 여신 소피 마르소의 힘인 것인지…마치 설탕 100스푼은 넣은 듯 심장을 콩닥콩닥 두근거리게 만드는 영화 <라붐> 속 ‘헤드폰 신’을 상상하게 됩니다.

영화 <라붐>속 헤드폰 신. [사진=다음무비 제공]

지난 주 수요산책에서는 ‘타이완 신 차오 랑 영화’ 즉 타이완뉴웨이브 영화의 미학적 정수를 맛볼 수 있는 허우 샤오 셴 감독님의 <비정성시>를 소개해 드렸는데요~ 지난 주말에 다시보기 하셨나요?

배우 양조위도 출연하고 또 타이완 현대사가 낳은 최대의 비극이자 민주화 이전까지 철저히 봉인된 타이완의 암울한 역사였던 2.28사건을 최초로 다룬 작품이며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장상을 받은 명작이지만 …하하…영화 <비정성시> 정말 솔직히 말해서  조금은  버거운  감이 없지 않아  있긴 합니다. 그러나 158분이라는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영화 <비정성시>는 아름다운 저우펀의 옛거리의 풍경과 영화 곳곳을 다채롭게 채운 잔잔한 음악의 선율로 인해 지루할 틈없이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데요.

주옥 같은 명장면이 너무 많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영화가 시작된 후 40분쯤, 여덟 살 때 사고로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남자 주인공 원칭과 그의 친구 우콴룽의 여동생 우콴메이가 필담을 나누며 둘 사이에 사랑이 싹트는 장면인데요.

한국의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비견되는 타이완 2.28 사건이 발생하자 타이완의 열혈 반체제 엘리트 지식인 우콴룽과 의기투합한 동지들은 원칭의 집에 모여서 강압적인 정권에 규탄하며 열띤 토론을 벌입니다. 그러나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원칭은 토론에 끼지 못하고 그저 친구들에게 음식을 내어주곤 조용히 뒤로 빠져서 축음기를 틀곤 우콴메이 곁에 다가가 앉는데요.

영화 42분쯤 …화면에 등장하는 이 장면 속엔 시국 토론을 하는 친구들의 열띤 목소리와 상반되는… 아름다운 선율이 축음기에서 흘러나옵니다… 들을 수 없는 원칭을 위해 우콴메이는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내용을 종이에 적어 원칭에게 설명해주죠.

영화<비정성시>속 필담을 나누는 장면. [사진='Just Relax' 유튜브채널 캡처]

원칭은 듣지 못하는 자신을 위해 노래의 내용을 설명하려 종이에 또박또박 글을 쓰는 우콴메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봅니다. 80년대 영화만이 갖는 그 특유의 감성… 오직 옛날 영화만이 선사하는 특유의 색감과 원칭 역을 맡은 양조위의 멜로 눈빛으로 두근두근 설득력 있게 남녀가 사랑의 빠지는 모습을 그린 이 장면을 장식한 것은 독일의 민요 <로렐라이>인데요. 이제는 뭐 커피숍이나 TV프로그램에서 <로렐라이>가 흘러나오면 자연스럽게 양조위의 멜로 눈빛과 사랑에 빠질 것같은 이 장면이 상상되는데요.

로렐라이는 독일의 라인강에 있는 바위 언덕의 이름입니다. 곳곳에 아기자기한 풍광을 빚어 놓은 라인강의 숱한 절경들 가운데서도 단연코 최고의 절경이라 손꼽히는 로렐라이 언덕 부근. 그러나 급류와 깊은 수심 그리고 암초로 이루어진 로렐라이 주변은 썩 로맨틱하지 않습니다. 예부터 이곳을 지나가는 배들이 바위에 부딪혀 침몰하는 사고가 잦았다고합니다. 그래서 이 로렐라이 부근 지역에는 많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데요. 아름다운 요정이 바위 위에 앉아 황금빛 머리를 빗으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자 지나가던 뱃사공이 요정의 아름다운 모습과 노랫소리에 현혹되어 배가 바위에 부딪쳐 침몰했다는 전설도 그중 하나입니다.

독일 낭만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도 이런 아름다운 전설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하이네는 로렐라이의 전설의 푹~빠져 1827년에 발표한 시집 <음악의 책>에 이 이야기를 담았는데요. 시집 제3부 ‘귀향’의 두 번째의 나오는 시가 바로 ‘로렐라이의 노래’입니다. 그리고 하이네가 쓴 이 시의 독일 작곡가 프리드리히 질허가 곡을 붙인 노래가 바로 오늘날까지 전해내려온 유명한 독일 민요 ‘로렐라이’인데요.

독일 로렐라이 언덕의 요정 동상. [사진=artisan투어 제공]

영화 <비정성시>에서 흐르는 독일 민요 ‘로렐라이’는 로맨틱한 장면을 더욱 부각시켰지만 한편으론 허우 샤오 셴 감독이 ‘아름다운 모순’을 표현한 민요 ‘로렐라이’를 통해 이상과 낭만을 쫓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받칠 준비가된 영화 속 타이완 반체제 엘리트 지식인을 로렐라이 언덕의 요정의 현혹되어 목숨을 잃은 뱃사공을 빗댄게 아닌지 추측되기도 하는데요.

오늘 방송마무리곡으로 ‘로렐라이의 노래’를 선곡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특별하게 차이친蔡琴 부른 중국어 버전을 준비해 봤는데요.

청취자분들도 제 선곡을 들으시고 영화<비정성시> 속 장면을 떠올려 보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모두 행복한 저녁 보내세요~

수요산책의 손전홍입니다.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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