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타이완 - 2021-03-30-뤼슈롄(呂秀蓮) 전 부총통2/2

  • 2021.03.30
전 중화민국 부총통 뤼슈리엔(呂秀蓮)의 신서

2021.03.30.-2/2

중화민국 제10대, 11대 부총통이자, 1번째 여성 국가 부원수, 1979년부터 국내 정치 민주화, 인권 및 타이완 역사 바로잡기에 심혈을 기울여왔고, 여성 권익 향상, 성평등에 있어서도 선구자 역할을 해왔다. 어제도 언급했듯이 타오위안(桃園) 지자체장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타오위안에서 최초 여성 지자체장이 되었었고, 1979년 가오슝 메이리다오 사건으로 군사재판에 넘겨져 실형을 선고받고 투옥한 경력도 있다.

또한 2004년 3월19일 당시 제11대 총통.부총통 선거 투표 하루 전, 당시 총통이었던 천수이볜(陳水扁, 1950.10-)의 고향인 타이난에서 유세활동을 벌이는 도중 2발의 총알이 총통과 부총통이 타고 있는 유세차량(무개차)로 날아들어와 총통이 저격됐다는 놀라운 속보가 전세계에 전파되었었다. 그 사건으로 사망하거나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선거 결과에 엄청난 반전을 일으켰다. 원래 전반적인 국내 분위기도 그렇고 여론조사에서도 지지도가 크게 떨어져 열세에 있었던 천수이볜 당시 총통이 다음날 투표에서 극소수의 표차(0.22%)로 재임에 성공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사건과 관련해서는 비공식적인 설이 매우 많은데 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하지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당시 진정으로 총상을 입은 사람은 천수이볜의 런닝메이트 뤼슈리엔(呂秀蓮. 1944.06- Annette Lu) 부총통이었다. 하지만 정계에서도 그렇고 언론에서도 그렇고 모두 천수이볜에만 스폿라이트로 비추었다.

뤼슈리엔은 한국과의 인연이 깊었다. 장징궈(蔣經國, 1910.04-1988-01) 총통 시대인 1987년 7월 타이완의 계엄이 정식으로 해제됐다. 그 다음해인 1988년 뤼슈리엔은 서울을 방문하고 당시의 반대당 리더였던 김대중과 김영삼 두 명의 정치인들을 만났고, 1990년 중국을 방문해 중국 중앙 대타이완판공실, 통일전선부 등 타이완사무 주무기관의 주관들과 양안관계에 대해 의견 교환을 가졌고, 1992년에는 타이완의 유엔 가입 운동을 펼치기 위해 자구책으로 뉴욕에서 국민외교를 전개했다.

2010년에는 서울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회동했고, ‘세계평화포럼’에 참석했다. 2013년에는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평화연맹’정상회의에 참석할 때 평화적인 대화로 분쟁을 해결하자는 의지로 ‘댜오위타이의 비군사화’ 주장을 재차 발표했다.

뤼슈리엔(呂秀蓮. 1944. Annette Lu)은 비록 정계에서 은퇴하였으나 정치 해석과 평론은 끊임없이 발표를 해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냉철한 정치인으로만 보일 수 있으나, 그녀는 마음이 따스하고 부드럽다. 여러 번 만나면서 느낀 것은 똑똑한 사람이지만 이보다 더 어울리는 수식어는 솔직하며 순수하고 착하다는 것이다. 뤼슈리엔은 재능과 덕을 겸한 순수한 여인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중국’을 ‘하나의 중화’로 한 글자만 바꾸면 양안간의 통일이나 독립이라는 갈등을 없앨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양안 통일’이 아니라 ‘양안 통합’이라며 역시 한 글자만 바꿔 쓴다면 쟁의가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녀는 타이완과 동북아의 대한민국과 일본이 손잡고 국가연합을 형성하며, 태평양 저편의 미국과 캐나다도 이에 합류해 ‘민주태평양국가연합’을 설립하며 영구적인 중립국가가 되고자 하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뤼슈리엔은 양안관계 및 미국을 포함한 3자 관계를 과거, 현재와 미래의 3단계로 나뉘어 연구한 것을 공유했다. 그러면서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자신은 어떻게 대처하고 싶다는 주장도 밝혔다. 또한 그녀는 항상 용감했다. 개인의 이념을 밝히는 데 주저하지 않았기에 체포, 투옥 등 경력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1978년 12월 16일 동시에 다 다음해, 즉 1979년 1월1일을 기해서 정식 국교 수립을 한다고 선포했다. 중국의 문을 열게 한 미국 대통령은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 1913.01-1994.04)이며, 중국과 수교할 때의 대통령은 지미 카터(Jimmy Carter, 1924.10.-)이다.

중화민국과 미국이 단교한 지 20년이 흐른 후, 당시 중화민국 총통 리덩후이는 지미 카터 미국 전 대통령을 타이완에 초청해 수훈과 오찬회 대접을 했다. 이에 앞서 지미카터는 타이베이 하얏트호텔에서 중화민국 주요 정부 관원과 주요 재계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특별 강연을 가졌다.

카터는 연설에서 타이완의 발전상에 대해 찬사를 보내면서 내뱉은 말은 바로 ‘단교한 것은 옳은 일’이라고 했다.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도 한 마디했다. 지미 카터는 ‘단교로 인해서 타이완의 민주 개혁을 촉진할 수 있었다’라고 덧붙였던 것이다.

뤼슈리엔은 당시 타오위안 지자체장의 신분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때 뤼슈리엔은 지미 카터에게 “타이완에 사과해야 한다”는 폭탄 발언을 해 큰 이슈가 되었던 바 있다. “당신은 타이완에게 사과해야 합니다”!!

뤼슈리엔은 한국에 대해 매우 호감을 갖고 있으며 타이완과 한국은 운명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여성인권운동을 펼치게 된 관건 동기로 한국의 법조인 여성운동가,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李兌榮, 1914.8.10 ~ 1998.12.17)의 영향을 받았다고 지난 3월17일 인터뷰에서 밝혔던 바 있다. 또한 부총통 시절에 당시 한국의 여성 국회의원들을 타이베이에서 만났는데, 그중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포함되었다며, 뤼슈리엔과의 만남 후 당시 대통령 출마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박근혜는 선거에 출마해, 제18대 한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하지만 나중에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을 받아 하야를 하고 현재 수감되었는데 대학부터 박사과정까지 법률을 전공했고 특히 헌법 연구에 조예가 깊은 뤼슈리엔은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임기 내에 수사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을 텐데 대한민국 헌법에는 그러한 보장이 없는지 모르겠다며 박근혜 전 대통령의 현황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표했다.

<兩岸恩怨如何了-양안 은원 여하료-양안간의 애증 관계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신서는 코로나 19 기간 대외 활동이 크게 줄어들면서 조용히 사고하며 정리하는 계기가 되어 집필 완성하게 되었다고 뤼슈리엔은 밝혔다. 그러면서 그녀의 무거운 인생의 발자취에는 여성, 인권, 민주 법치가 묻어있고, 타이완의 존엄과 세계의 평화에 평생 심혈을 기울이며 일생의 사명이라 여기고 있는다. 뤼슈리엔은 바로 이러한 태도에서 출발해 양안간의 사랑과 증오, 거의 같은 조상을 두고 있어 발전 과정에서 얽히고 얽혀 풀기 쉽지 않은 관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깊이 사고하면서 이 책을 출간했다고 생각한다.

만약 청일전쟁으로 인한 1894년 시모노세키 조약이 없었다면 타이완은 1895년에서 1945년 사이 50년 동안의 일본 통치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2차 대전 종전 전에 미 해군은 타이완을 공격 점령 후 이어서 일본을 섬멸하려는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실질적으로는 미 육군의 필리핀 루손과 일본 오키나와를 먼저 점령한 후 일본을 박멸한다는 계획으로 대체되었다. 만약 미 해군의 계획으로 추진되었다면 지금의 타이완은 또 어떠한 신분일까? <카이로 선언>이 없었다면, 일본의 무조건 항복 이후 당시 국민정부 천이의 군대도 아마 난징으로 복귀했을 것이고, 몇 년 후 국공 내전에서 패한 장제스도 타이완을 부흥기지로 삼고자 타이완으로 잠시 철수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토록 타이완은 중국대륙과의 모든 면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를 지녔었다.

그 외에 마오져둥은 타이완을 적화시키려 했으나 한국 전쟁 폭발로 에치슨 라인 밖에 있는 타이완을 미국이 그냥 베이징당국으로 넘어가도록 방관하지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71년에 원래의 중화민국을 대체하여 유엔 안보리 상임 이사국이 되었고, 당시 장제스 총통은 ‘두 개의 중국’ 또는 ‘하나의 중국, 하나의 타이완’이라는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그후 타이완의 국제상에서의 처지는 여러분도 잘 아신다고 믿는다. -jennifer pai

3/30 오늘의 타이완

취재.원고.보도: 백조미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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