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과의 단교 '함께 극복합시다'! 1978년 ‘자강구국운동’

  • 2022.11.01
레트로 타이완
지난 26일 타이완 연합보는 1978년 타이완에서 일어난 자강구국운동에 대해 보도했다.당시 한 미용실에 설치해 둔 모금함.[사진 출처= 타이완 연합보 온라인판 캡처]

레트로타이완시간입니다.

1978년과 1979년 사이 타이완 외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뭔지 묻는다면, 대다수 타이완인은 미국과의 단교를 꼽을 것입니다.

냉전 초기에는 자유진영 국가들이 타이완과 수교를 유지해 타이완은 중국보다 수교국이 월등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며 미국, 일본, 프랑스 등이 잇따라 중국과 수교를 맺고 타이완과 단교를 했죠. 그리고 타이완인과 타이완사회에 가장 큰 좌절감을 안긴 것은 영원한 우방국으로 여겼던 미국이 단교를 통보한 것이었습니다.

타이완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아픈 기억인 미국과의 단교! 1978년 가장 믿었던 우방국인 미국이 중국의 손을 잡으면서 타이완은 국제사회에서 외교적 고립이라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외교적 상황은 외려 타이완 국민들의 애국심은 들끓게 했고, 혜성처럼 자강구국운동이 등장합니다.

중국을 선택하고 타이완에게 단교를 통보한 미국에 맞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국민 스스로 나라 곳간을 지키고자 일으킨 이 자강구국운동은 애국심 넘치는 타이완 기업, 단체 그리고 개인이 국토방위 등 목적으로 자발적으로 국가에 기부금을 헌납했습니다. 1978년 타이완에서 일어난 자강구국운동은 국내를 넘어 해외 교포들도 참여할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오늘 레트로타이완시간에서는 미국과의 단교 이후 국토안전, 외교적 위기를 다 함께 극복하며, 타이완인의 결기를 보여준 상징과도 같은 자강구국운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타이완과 중국 양안 문제는 국제사회에서 민감한 외교사안으로 꼽힙니다. 타이완을 지칭하는 이름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중화민국, 타이완, 차이니즈 타이베이, 리퍼블릭 오프 타이완, 타이완 공화국(Republic of Taiwan) 등 세계무역기구 WTO, 국제올림픽위원회 IOC와 수교한 국가들이 타이완을 지칭할 때 각각 사용하는 이름입니다.

통상 국제법에서 국가의 형성조건은 영토, 국민, 주권 그리고 국제 협약을 맺을 수 있는 능력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타이완은 국제법상의 국가 형성 조건을 다 갖추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느 주권국가와는 달리 국제사회에서 통일된 하나의 국호를 갖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타이완이 어정쩡한 위치에 있게 된 것은 타이완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치 중인 중국과의 관계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타이완이 국제사회에서 중국에게 밀려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의 태도 변화에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승전국으로써 유엔 창설 이후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었던 자유중국, 타이완! 국공내전 이후 타이완으로 옮겨온 뒤에도 자유중국, 타이완은 유엔 창립 회원국으로서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중화인민공화국은 유엔 가입조차 쉽지 않았죠. 

하지만 1971년 10월 25일 제1967차 유엔 총회 표결에 따라 모든 게 뒤바뀌게 됩니다. 타이완 외교사에서 대재앙으로 기록된 알바니아가 제안한 유엔 결의안 제2758호로 인해 1971년 10월 25일,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 정부는 중국이 됐고, 이날 최종 결정에 따라타이완은 유엔과 산하기구에서 지위를 잃었고, 대신 중국이 모든 자리를 꿰차게 됩니다.

설상가상 같은 시기 닉슨 행정부의 ‘핑퐁 외교’는 타이완 국민들로 하여금 울분을 토하게 했습니다. 1971년 4월,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미국 대표단이 일주일 동안 중국을 찾아 여러 도시를 돌면서 교류를 가진 것을 계기로 미국은 헨리 키신저를 중국에 보내 핑퐁 외교를 시작했습니다. 핑퐁 외교로 차근차근 쌓아온 미국과 중국의 교류는 1978년 12월 16일 지미 카터 대통령이 중국과의 공식 수교를 공표하면서 결실을 맺게 됩니다.

상하이 코뮈니케를 통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재확인하고, 중국과 정식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로 합의한 미국은 1979년 1월 1일을 기해 타이완과의 단교를 발표했습니다.

1978년 12월 미국이 단교를 통보하면서, 당시 단교, 주둔 미군 철수 등의 단어가 신문 지면에 넘쳐났습니다. 미국의 태도 변화로 타이완 국민은 전쟁이 일어날 수 도 있다는 불안감과 함께 미국의 입장 변화는 외려 타이완 국민들의 애국심을 들끓게 했고, ‘자강구국운동’이 시작됐습니다.

미국이 중국과의 공식 수교를 통보하고 정확히 나흘 뒤인 1978년 12월 20일, 국토방위를 위한 경비로 쓰일 기부금을 모금하고자 정부 주도로 중앙은행의 누구나 국방헌금을 기부할 수 있는 ‘자강구국기금’이라는 전용계좌가 개설됐습니다. 타이완 국내 기업들은 경쟁적으로 국방 헌납에 동참했습니다. 미국의 단교 통보로 촉발한 자강구국운동은 국토방위를 위해 애국 기업과 타이완 국민이 자발적으로 헌금하고 나아가 범국민 캠페인으로 확대되며 해외 교민들도 동참할 정도로 반향이 컸습니다.

자강구국운동에는 ‘경영신’이라 불리는 고 왕융칭 타이완 플라스틱그룹 회장도 동참했습니다. 고 왕융칭 회장은 단교 소식을 접한 뒤 즉시 총통부를 찾아 뉴타이완달러 5천 만원을 기부했고, 또 자영업자들은 단합하여 가게에 모금함을 설치하며 자강구국운동에 적극 동참했습니다. 이밖에 당시 일부 미용실에서는 머리를 자르는 비용을 고객들이 직접 자강구국운동 모금함에 기부하도록 하며 동참 열기를 가열 시켰습니다.

타이완의 기업, 단체 그리고 국민 개인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돈을 자발적으로 내놓은 ‘자강구국운동’ 덕분에 타이완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미국과의 단교라는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자강구국운동’은 타이완인의 마음에 깊이 각인돼 있습니다. 오늘 엔딩곡으로 루광중(盧廣仲)의 내 마음에 새겨진 이름(刻在我心底的名字)을 띄어드리며 마치겠습니다. 이상으로 레트로타이완시간의 손전홍입니다.

프로그램 진행자

관련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