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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ti 중앙방송국Rti 중앙방송국[그때 그 시절] 타이완의 장발 단속은 어땠을까?

  • 2022.01.25
레트로 타이완
장발을 한 청년이 경찰에 연행되는 모습이 담긴 1971년 3월 28일자 기사 속 흑백사진. [사진 = 연합보 기사 사진 캡처]

레트로타이완시간입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라는 고사성어를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이 말은 공자의 저서 『효경(孝經)』 첫 장의 유명한 구절로 ‘우리의 몸과 뼈 그리고 살갗 모두 부모로부터 받았으니 몸의 터럭 하나라도 감히 훼손하거나 다치지 않게 잘 보존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며 몸을 건강하게 잘 유지하는 것이 자식으로써 부모에 대한 효의 끝이다’라는 심오한 뜻과 유교의 가르침이 담겨져 있는데요.

유교 사상이 생활 속에 뿌리 깊게 자리잡았던 명, 청나라와 조선 시대엔 이런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내 몸은 머리터럭 한 올, 손톱 한 조각일지라도 모두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기 때문에 효의 상징이었던 머리카락 한 올을 함부로 자른다는 건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1895년 12월 고종 32년에 “성년 남자는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 머리를 하라”는 고종의 칙령이 선포되며 이른바 단발령이 내려졌고, 개혁의 일환이었다고는 하나 효의 상징인 머리를 자르라는 것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대쪽 같은 선비로 유명한 최익현은 “손발은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을 자를 수는 없다”며 차라리 상투 대신 목을 자르라며 버틴 일화는 너무 유명하죠.

한편 국부 순원(孫文)선생은 1911년 신해혁명에 성공한 뒤 개혁 정책으로 변발 자르기를 내세웠습니다.

당시 변발 자르기란 혁명 세력과 청나라 정부가 갈리는 첫걸음으로 변발 자르기는 곧 청과의 인연을 끊는 ‘혁명’의 상징이었고, 당대 문명의 최신식 ‘패션’이었습니다. 다만 과거 오랑캐 머리라고 싫어하는 것을 넘어 변발을 혐오하던 한족들이 변발을 자르는 것을 거부하면서, 국민정부는 애를 먹기도 했습니다.

과거 청나라가 명을 정복하면서 만족들이 자신들에게 굴복하라는 뜻으로 한족들에게 자기들의 ‘헤어스타일’인 ‘변발(辮髮)’을 강요했습니다. ‘오랑캐 머리’를 할 수 없다고 버티던 한족들은 강희제, 용정제, 건륭제 등 청나라의 통치 아래 결국 변발을 하게 되었고, 게다가 그 변발의 관습은 무서웠습니다. 오랑캐 머리라고 그렇게나 싫어하던 한족들이 청나라 말에는 이 헤어스타일에 익숙해져 오히려 변발을 지키려고 하면서 변발을 폐지할 때는 애를 좀 먹어야 했습니다. 다행히 청과의 단절,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 변발 폐지령이 내려진 다음날 많은 이들이 손수 변발을 자르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효의 상징이었던 머리카락 한 올, 손톱 한 조각을 자른다는 건 유교 사상이 깊숙이 박힌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더 나은 세상…혹은 새로운 시대로 뻗어나가기 위해 신해혁명 이후 청나라 말에는 스스로 변발을 자르고, 조선 말에도 상투를 잘랐죠.

그리고 타이완과 한국, 한국과 타이완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다시 한번 ‘머리카락’ ‘장발’과의 전쟁이 벌어집니다. 바로 1960~70년대 서방국가, 서구 사회에서 히피 문화가 유행하던 때!

1960년대 중반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번져나간 히피문화가 팝음악과 함께 타이완과 한국에 들어오면서, 장발과 나팔바지 등은 자유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두 나라 청춘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우선 당시…한국 정부는 장발을 퇴폐풍조로 규정하고 1973년엔 아예 경범죄 처벌법 개정안에 장발 단속을 포함시켜 ‘히피성 장발’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벌였습니다.

1960년대 타이완 젊은이들 역시 멋으로, 또 자유를 향한 갈망으로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장발을 고집하는 대학생들과 예술인들이 사회를 비판하는 창작품을 발표하고…반사회적인 모임 등이 잦아지자 정부 입장에서는 장발이 곧 사회저항 행위로 느껴지기 시작됐고, 이후 머리를 기르는 것을 괴상한 행위라 낙인찍고 타이완 정부도 본격적으로 ‘장발’ 단속을 벌였습니다.

당국에서 이렇게 장발 정화 지시가 내려지자 경찰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가위와 자를 들고 청년들을 잡아들여 긴 머리를 잘랐습니다. 장발로 적발되면 길거리에서 혹은 가까운 파출소나 경찰서로 연행되어 머리를 깎은 후 귀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 청춘들은 악착같이 장발에 나팔바지를 입고 거리를 활보했고, 1971년 1월 10일자 연합보 기사를 보면 전날인 1971년 1월 9일 타이베이시 젊음의 거리 시먼딩에서 장발단속을 하였는데, 이날 해가질 무렵인 오후부터 밤10시까지 2개 지구대에서 합동으로 총 200여명의 히피성 장발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청년을 잡았고, 경찰서로 연행해 머리를 깎은 후 즉시 귀가시켰다고 보도했습니다. 당시 타이완 젊은이들의 머리 수난사를 짐작할 수 있는데요. (다만 장발로 적발되고 나서 순순히 머리를 깎으면 바로 귀가 조치가 내려졌지만, 머리를 깎지 않고 버틸 경우 혹은 장발 단속에 걸렸던 전과가 있던 이들은 재판에 넘겨지기도 하고, 경찰위반법 제 66조 제1항에 따라 3일 구금이 가능하고, 당시 타이완달러 60원에서 120원에 벌금이 부과됐습니다.)

무엇보다 장발 단속 대상은 청년뿐만 아니라 고급 호텔 직원들도 해당했습니다. 당시 CNA 중앙사 기사 사진을 보면 타이베이 힐튼 호텔 총지배인이 직접 자를 들고 직원들의 머리 길이를 검사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당시 장발에 대한 힐튼 호텔 기준은 옆머리가 귀를 덮거나 뒷 머리카락이 20cm내로 옷깃을 덮으면 안됐고, 호텔 규정을 위반한 직원은 즉시 감봉조치가 내려졌다고 해요.

문화예술인들도 장발단속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외국연예인이라 할지라도 장발인 채로 타이완을 입국할 수 조차 없었습니다. 예컨대 1970년 영화 촬영차 타이완에 머물던 홍콩 남자배우 장이(張翼)와 웨이훙(韋弘) 이 두 배우는 시먼딩 영화의 거리에서 장발로 붙잡혔고 영화배우라고 뭐 특혜도 없이 곧장 머리를 잘랐습니다. 1971년 3월 28일자 연합보 기사에 따르면 당시 이 두 배우를 적발한 지구대에서는 머리를 자르는 과정에서 두 홍콩 배우 모두 경찰에 굉장히 협조적이었다고 밝혔습니다.

홍콩배우외에도 1972년 인기를 구가하던 타이완 청춘스타 장량(江浪)은 드라마 ‘청춘고왕《青春鼓王》’ 촬영 도중 세트장에 출동한 경찰에 의해 연행될뻔했던 일화는 지금도 유명한데요. 당시 경찰 측에서는 장발을 한 배우 장량과 그가 맡은 드라마 속 정직한 성격에 배역이 맡지 않는 다는 이유로 그에게 단발령을 내렸지만, 배우 장량이 머리를 깎지 않고 드라마 촬영을 계속 이어가자 경찰이 세트장에 들이 닥쳐 엄포를 내린 것이었습니다. 

타이완 청춘스타 장량(江浪)이 출연한‘드라마 '청춘고왕《青春鼓王》'의 포스터. 포스터 속에서도 볼 수 있듯 귀를 덮는 머리스타일로 인해 당시 배우 장량에게 머리카락을 자르라는 단발령이 내려졌었다. [사진=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오늘 레트로타이완시간에서는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안가는 타이완과 한국 두 나라의 그때 그 시절 아련한 역사의 흔적인 장발 단속에 대해 짚어봤는데요,오늘도 유익한 정보와 함께 즐겁게 청취 하셨기를 바라면서, 오늘 엔딩곡은 타이완에서 장발하면 떠오르는 가수 롼탄아샹(亂彈阿翔)의 완벽한 착지(完美落地)를 띄어드리며 마치겠습니다. 이상으로 레트로타이완시간의 손전홍입니다.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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