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과 한국의 다양한 문화 이야기
-2023.11.14.
-진행: 노혁이, 백조미
-최전선 군사기지가 관광지로, 고량주와 식칼의 고장 진먼
1949년 금문 포격전을 계기로 생겨나게 되었다. 금문고량주는 당시 진먼섬의 주민이자 싱가포르 화교 출신었던 예화청(葉華成)이 자택에서 소규모로 술을 만든 데서 시작한다. 이 예화청이라는 인물은 원래 사업가로 양조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는데 중화민국 국군에서 퇴역한 양조기술자들로부터 기술을 배워 양조 사업에 뛰어들었다.
예화청은 1950년 진청진(金城鎭) 진먼청촌(金門城村)에 양조장 터를 잡고 '진청주창(金城酒廠)’을 세워 금문고량주의 기틀을 다졌다. 그리고 진먼섬에 주둔한 군에 군납용으로 술을 납품하기 위해 인맥을 통해 중화민국 국군 제19군 복지기구에 위탁판매를 할 수 있는 납품계약을 맺어 금문고량주의 판로를 열게된다.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과의 전투로 인해 작은 진먼섬에는 10만명의 군인이 주둔해 있었는데 진먼 포격전 당시 진먼섬으로 포격이 날아오면 병사들이 모두 지하벙커로 피신해야 했다. 한번에 수백발의 포탄이 떨어지는 극한 상황에서 병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일반 백주보다 훨씬 독하면서도 맛이 좋았던 금문고량주는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이때 당신 진먼섬의 전권을 쥐고 있던 후롄(胡璉) 장군이 소속 연대장의 추천으로 금문고량주를 맛보게 되면서 상황이 크게 달라진다.
평소 진먼섬의 군대와 지역주민이 소비할 술과 쌀을 모두 대만 본토에서 들여오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던 그는 진먼섬이 수수를 재배하기 아주 좋은 환경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현지 주민들에게 수수 재배를 맡겨 수확된 수수를 군 보급품인 쌀과 맞바꾸고 백주를 현지에서 생산한다는 계획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섬 주민들은 쌀밥을 먹으면서 섬에서 생산한 술을 마실 수 있게되어 결과적으로 군과 민간인 사이의 화합을 도모할 수 있었다. 또한 부산물인 수숫대는 연료로 사용할 수 있으면서 본토에서 술을 들여오는 운임비도 지출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정말 일거양득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많은 점이 해결되는 방안이었다.
1952년, 후렌 장군은 군을 동원해 예화청의 '진청주창’을 일방적으로 흡수하고 군이 직접 운영하는 양조장인 '주룽장주창(九龍江酒廠)'을 설립한다. 더불어 예화청을 기술책임자로 영입해 병사 중에 중국 본토의 주창에서 술을 만든 경험이 있던 병사들과 함께 금문고량주를 생산한다. 당시에 예화청은 꽤 불만이 있었으나 언젠가는 되찾을 가능성이 있던 양조장이 군을 통해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고 기술과장으로서 고액의 연봉을 보장받아[2] 큰 반발없이 넘어갔다고 한다.
금문고량주는 모든 제품이 고도수라 유통기한이 무기한이다. 모든 제품에 병입일자를 표기하고 프리미엄 제품은 증류일자와 병입일자를 모두 표기한다. 금문고량주는 5년 이상되면 가격이 상승하는데, 병입 후에도 알콜성분이 안정화되면서 술맛과 향이 좋아지고 목넘김이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다. 예전 진먼주창의 회장은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대만 사람들에게 은행에 예금하지 말고 금문고량주를 구입해 소장하라고 한 적도 있다. 은행 금리보다 금문고량주의 가격 상승폭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7년에 나온 15년 지난 고량주는 현재 2.5배 가량 가격이 뛰었다.
수수, 밀, 화강암반수 세가지 천연재료만으로 중국 전통명주를 만드는 기법인 고태법으로 발효하여 증류한 후 숙성 과정을 거친다. 특이하게도 냉전시기에 건설된 지하방공호에서 술을 숙성시킨다. 화강암 동굴 저장고. 축축하고 서늘하고 어두운 환경은 금문고량주를 숙성하기에 최적의 환경.
⭐2023 Rti 팟캐스트 앙케트 조사
설문에 응해주시면(약5분 소요) 추첨을 통해 선물을 드립니다.
이벤트 사이트:https://2023appsurvey.rti.org.tw/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