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 곳곳에 랜드마크를 찾아 현지인만 아는 이야기를 알려드리는 <랜드마크 원정대> 시간입니다. 이제부터 가이드북을 버리세요! <랜드마크 원정대>를 따라 타이완 여행을 즐깁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랜드마크 원정대>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올해로 30회째를 맞은 타이완국제여성영화제(WMWFF)가 지난 10월 22일 순조롭게 막을 내렸습니다. 이 영화제는 금마장영화제(TGHFF)에 이어 타이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영화제이자 최초로 순회상영을 시작한 영화제이며, 여성 영화의 보급과 여성 감독의 발굴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30주년인 만큼 과거 영화제에 방용된 영화를 재방영하는 특별 프로젝트가 마련되었는데, 이 중 타이완 공창제(公娼制) 폐지 후 벌어진 성노동자 권리 운동을 다룬 다큐멘터리 《늙은 여자(老查某)》와 《일대의 명기-관슈친(一代名妓—官秀琴)》가 공개되자 성산업 합법화에 관한 논의가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현재 타이완의 성산업은 ‘성산업 특별구역(性產業專區)’에서만 합법입니다. 특별구역 밖에서 성매매를 한 경우 성노동자, 성매수자, 중개인 또는 고용주 모두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성산업 특별구역을 설치하려는 지방정부가 아직까지도 부재해서 현재 타이완에서 합법적인 성산업은 없습니다.
타이완의 성산업은 청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요. 중국과의 무역왕래가 크게 발전되면서 타이완 각지의 항구와 번화가에서 수많은 기생집과 술집이 나타났고, 주로 상민이 많이 가는 기생집인 ‘사창료(私娼寮)’, 그리고 춤, 노래 등 예능을 통해 손님을 접대하는 고급 술집인 ‘예단간(藝旦間)’으로 나뉘었습니다. 일본 식민지 시대에 들어 성에 대한 일본 남성의 수요와 건강, 타이완의 성산업 관리를 위해 일본 정부가 1896년 공창제도를 도입하여 타이완 전역에서 16개의 합법적 성매매 장소인 ‘유곽(遊廓)’을 설치했습니다. 만16세 이상의 여성만 공창이 될 수 있으며, 공창이 된 후 일주일에 한 번씩 지정된 병원에서 정기검진을 받고 유곽 밖으로 함부로 나갈 수 없는 등의 규정을 준수해야 했습니다. 반대로 유곽 밖에서 성매매에 종사하는 성노동자는 불법의 사창(私娼)이었습니다. 1920년대의 타이베이를 예로 들자면 완화(萬華)와 단수이(淡水)에는 유곽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다다오청(大稻埕) 일대에는 비교적으로 고급스러운 술집이 많았고, 베이터우(北投)에는 온천에서 손님을 목욕시키는 성매매를 위주로 했습니다.
완화 유곽 - 사진: 국가도서관
중앙연구원 천정위안(陳姃湲) 연구원의 논문 〈식민지 타이완의 조선 성노동자 (在殖民地臺灣社會夾縫中的朝鮮人娼妓業)〉에 따르면, 일본 식민지 시대에 70% 이상의 공창은 일본인이었고 대부분 타이완인은 불법인 사창이었습니다. 공권력에 의해 매춘녀로 낙인찍히기 쉽고 신체의 자유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당시 타이완 성노동자들이 공창제도를 보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사창은 여전히 대다수였습니다. 따라서 천 연구원은 공창제도는 일본이 타이완의 사회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통치자로서 생리적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도입한 제도로, 타이완의 일본인 커뮤니티에만 존재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일부 조선 여성들은 인신매매 조직이나 성산업 업자를 통해 타이완에 와서 공창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일본 손님을 겨냥해 점차 시장을 확보했고 1930년대부터 타이완인 공창의 인원수를 넘어섰습니다. 당시 유곽마다 ‘조선루(朝鮮樓)’가 보이고 심지어 외딴섬 펑후(澎湖)에도 있었습니다.
1935년 타이베이 완화 유곽에는 조선루 두 곳이 있었다. - 사진: https://www.beclass.com/rid=2748bfc632e5affbfe27
일본 패배 후 언론과 여론이 성병 문제가 심각하다는 반응을 보이자 당시 타이완의 최고 행정기관인 타이완성행정장관공서가 1946년 공창제를 폐지했으나 효과는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1949년 중화민국 정부의 이전과 함께 수많은 군인들이 타이완에 오면서 성에 대한 요구가 크게 생겼는데, 정부는 1955년 <타이완성기생관리방법>을 제정해 2년 내 기존 성노동자의 전업을 지원하고 성산업을 근절하기로 했지만 실무상의 어려움으로 결국 관련 작업을 무기한 연장했습니다. 가장 많을 때 타이완 전역에는 총 505개의 공창관(公娼館)이 있었습니다. 1970년대 타이베이의 공창관은 완화와 다다오청에 있었습니다.
비록 <타이완성기생관리방법>은 공창제도의 법적 근거가 되었지만 여전히 공창제의 전면 폐지를 최종 목표로 삼았습니다. 법조에서는 공창관 면허증은 양도, 임대, 또는 상속할 수 없으며, 책임자가 사망한 후에는 다시 영업할 수 없다는 등의 규정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공창제를 정식으로 폐지하지 않더라도 공창관은 일정 시간 이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고 사실상 공창제 폐지와 다름이 없죠.
그럼 공창제는 과연 어떻게 폐지된 건가요? 1997년 타이베이 시장이었던 천수이볜(陳水扁) 전 총통은 타이베이시의회 질의응답 시간에서 8명 시의원에 의해 “성매매를 대대적으로 소탕하고 있는데도 왜 계속 공창 면허를 발급했는냐”는 질의를 받자 48시간 안에 공창제도를 폐지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급작스러운 폐지 때문에 하루아침에 밥줄이 끊긴 공창들이 캄캄한 공창관에서 길거리로 나섰습니다. 1999년 공창 관슈친(官秀琴)을 주축으로 한 성노동자 권리운동 조직 ‘일일춘협조회(日日春關懷互助協會, 전 공창자구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관슈친은 바로 올해 타이완여성영화제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일대의 명기》의 주인공입니다. 성노동자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으로 많은 공창들이 모자를 쓰고 얼굴을 가린 채 항쟁에 참여했습니다만 관슈친은 자신의 직업이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하여 당당하게 항쟁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공창들의 항쟁으로 타이베이시는 공창제의 폐지를 2년 후인 2001년으로 미루었습니다. 다른 지방정부도 타이베이시를 따라 공창제를 폐지했고 2022년까지 타오위안에 있는 타이완의 마지막 공창관의 폐업과 함께 타이완의 공창제는 역사가 되었습니다. 공창제 폐지 이후 많은 공창들이 생계를 위해 정부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사창이 되어 성매매에 계속 종사하고 있습니다. 관슈친도 이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보호 없이 사창들은 폭력조직이나 경찰과 직접 맞서야 하는데, 관슈친은 사창관을 운영하기 위해 사채를 빌리고 큰 스트레스에 시달려 결국 2006년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2022년 폐업한 타이완 마지막 공창관 타오위안 '톈톈러(天天樂)' 사진: CNA
다행히 여전히 희망이 있습니다. 같은 해 관슈친이 근무했던 공창관 ‘원멍러우(文萌樓)’가 타이베이시정부로부터 문화재 자격을 받았습니다. 일본 식민지 시대부터 민주화 이후 타이완 근현대의 성산업 역사를 목격하는 원멍러우는 관슈친을 비롯한 공창들의 정신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2011년 <사회질서유지법>의 개정으로 성산업 특별구역 제도가 확립되었으나 주변 집값 하락, 주민 반대 등 이유로 아직까지도 법에만 존재하는 용어입니다. 성노동자는 오랫동안 사회악으로 여겨져 왔지만 성욕은 식욕과 같이 인간의 본능이며 외면한다고 해서는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지금도 많은 성노동자들이 법적으로 근로자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들의 권익을 보장하고 성산업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지는 앞으로의 큰 과제입니다.
타이완 성산업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시면 지난 8월 26일 저와 서승임 아나운서가 함께 진행하는 <신박한 MZ세대 둘>을 청취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주는 계속해서 원멍러우에 대해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랜드마크 원정대>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주는 계속해서 원멍러우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
1. 〈公娼制度的介紹與歷史演變(1950s-1997)〉,國藝會補助成果檔案庫。
2. 陳姃湲,〈在殖民地臺灣社會夾縫中的朝鮮人娼妓業〉。
3. 公視紀錄觀點【公娼啟示錄】。
4. 李修慧,〈一個時代的終結:宜蘭最後一家公娼館「松月屋」結束營業〉,關鍵評論網。
5. 台灣東販,「為何一名台北妓女,會獲得諾貝爾和平獎提名?課本不提的『性福』產業史」,風傳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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