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 곳곳에 랜드마크를 찾아 현지인만 아는 이야기를 알려드리는 <랜드마크 원정대> 시간입니다. 이제부터 가이드북을 버리세요! <랜드마크 원정대>를 따라 타이완 여행을 즐깁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랜드마크 원정대>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무지개 깃발이 타이베이 시내 곳곳에 휘날리는 날이었습니다. 하늘이 잿빛으로 물들고 가랑비가 내리는 전형적인 타이베이 날씨였습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오후부터 비가 그쳤고 하늘이 점점 밝아졌습니다. 무지개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화려하게 분장한 사람들이 깃발로 만들어진 무지개 바다 속에 평등의 길을 함께 걸었습니다.
올해로 21회째를 맞은 타이완 LGBT(레즈비언 Lesbian, 게이 Gay, 양성애자 Bisexual, 트랜스젠더 Transgender) 프라이드 퍼레이드가 지난 10월 28일 타이베이시정부 광장에서 열렸습니다. 이 퍼레이드는 이스라엘 텔아비브 프라이드 퍼레이드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성소수자의 축제입니다. 예상보다 좋은 날씨 덕분에 올해 참가자 수는 약 17.6만 명으로 2019년 타이완 동성결혼 합법화 이후 두 번째로 많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라이칭더(賴清德) 중화민국 부총통, 수전창(蘇貞昌) 전 행정원장, 장-뤽 로메로 미셸(Jean-Luc Romero-Michel) 프랑스 파리 부시장 등 정치인도 동참했습니다.
2023 타이완 LGBT 프라이드 퍼레이드에 참여한 라이칭더(賴清德) 부총통 - 사진: RTI
타이완 동성결혼 합법화의 일등 공신으로 여겨진 수전창(蘇貞昌) 전 행정원장 - 사진: 수전창(蘇貞昌) 페이스북
또한 한국 서울퀴어문화축제(SQCF)가 처음으로 퍼레이드에 참여해 부스를 설치하기도 했는데요. 이날 양선우(홀릭)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장은 ‘세계와 함께(與世界同行)’ 코너에서 “올해 서울시가 퀴어문화축제의 서울광장 사용을 불허했는데 당시 타이완 퍼레이드의 주최측인 타이완무지개시민행동협회(臺灣彩虹公民行動協會, 이하 무지개협회)는 많은 성원을 보내줘서 감사하다”고 언급했습니다.
지난 7월 1일 서울 중구 을지로2가 일대에서 열린 제24회 서울퀴어문화축제에는 무지개협회도 참여해 한국 측과 교류했습니다. 타이완 동성결혼 합법화 이후의 퍼레이드 상황에 대해 무지개협회는 최근 몇 년 간 퍼레이드의 분위기가 더욱 유쾌해졌다며, 동성결혼 합법화는 결코 성소수자 운동의 종점이 아니고 HIV/AIDS 예방 및 인식개선 교육, 노인 동성애자 이슈, 트랜스젠더 이슈, 타이완-중국 동성결혼 합법화 등 많은 과제가 남아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지개협회는 올해 퍼레이드 홈페이지에서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동성결혼이 이미 합법화되었는데 왜 계속 퍼레이드를 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타이완에 성별, 성적 지향, 성 정체성 때문에 외로움 또는 두려움을 느껴 당당하게 살 수 없는 사람이 있는 한 퍼레이드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대답할 것”이라고 작성했습니다.
성소수자 권리운동에 있어서 타이완은 선구자와 같은 존재지만 여전히 많은 차별과 편견이 존재합니다. 지난 5월 타이완 정치 드라마 <인선지인: 웨이브 메이커스(人選之人-造浪者)>로 촉발된 미투운동이 타이완 정계, 언론계, 문화계, 교육계, 연예계, 스포츠계 등을 세차게 흔들었습니다. 같은 시간 타이완 최고 명문대인 국립타이완대학교 경제학과 학생회장 선거 기간 동안 한 후보자가 ‘LGBTQ 및 개는 학과사무실에서 게임해서는 안된다’, ‘A컵 이하 여성은 국방수업 2학점을 채워야 한다’, ‘성경험 없는 남성은 댄스 파티 참석 불가, 성경험 없는 여성은 강제 참석’ 등 혐오발언을 발표해 각계의 질책을 받았습니다.
성차별 관련 사건이 잇따라 나타나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올해 퍼레이드의 주제는 ‘스탠드 위드 다이버시티(與多元同行, Stand with Diversity, 다양성과 함께)’로 성평등, 성다양성 등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환기하도록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남자와 여자,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정상과 비정상…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이원적 대립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다원이란 타인을 공격하고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모든 사람의 힘을 모아 공감대를 형성하는 겁니다.
애초에 타이완 LGBT 퍼레이드는 정부의 예산을 받아 개최된 첫 타이완 성소수자 행사인 ‘타이베이 LGBT 축제(台北同玩節, Taipei LGBT Civil Right Movement)’의 일환으로, 2005년부터 상업적인 후원을 받기 시작해 점차 현재의 규모로 발전해 왔습니다. 퍼레이드의 중국어 명칭은 ‘동지 대행진(同志大遊行)’인데 동지(同志)란 동성애자입니다. 원래 동지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만을 지칭하다가 1980년대부터 홍콩에서 동성애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 시작해 타이완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동성애자(同性戀)’라는 단어보다 비교적 중성적이고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LGBT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에 대해 알아봅시다. 1978년 미국 아티스트 길버트 베이커(Gilbert Baker)가 디자인한 무지개 깃발은 분홍(성별, Sexuality), 빨강(생명, Life), 주황(치유, Healing), 노랑(햇빛, Sunlight), 초록(자연, Nature), 청록(마술/예술, Magic/art), 남색(평온/조화, Serenity/harmony), 보라(정신, Spirit) 등 8색이 있었는데, 원단을 구하기 어려웠던 분홍색을 제외했고, 1979년 청록과 남색을 파란색으로 대체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6색 무지개 깃발이 되었습니다. 또한 2007년 제5회 타이완 퍼레이드에서 타이완 무지개 깃발의 의미가 확립되었습니다. 빨강은 성적 권리, 주황은 함께하는 힘, 노랑은 희망, 초록은 사람의 본성, 파랑은 자유, 보라는 예술입니다.
좌로부터는 1978년 미국 아티스트가 최초로 디자인한 8색 무지개기, 분홍색을 제거한 7색 무지개기, 1979년부터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6색 무지개기 - 사진: 위키백과
타이완 성소수자 운동하면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한 첫 동성애자 치자웨이(祁家威)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올해 퍼레이드에서도 이 위대한 운동가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치자웨이는 1986년 동반자와 혼인신고를 하려다가 정부기관에게 거절당하자 동성결혼의 법제화를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민법에서 동성 결혼을 제한하는 것은 헌법에 저촉된다”고 주장하며 2000년 헌법해석을 요청했지만 수리되지 않았습니다. 2013년 다시 혼인신고를 시도했으나 또 한번 거절받은 후 민간조직과 협력해 다시 헌법해석을 요청했습니다. 2017년 3월 24일 치자웨이는 마침내 헌법 재판소에 들어갔고, “이 날을 위해 나는 41년 6개월 24일을 기다렸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같은 해 5월 헌법 재판소에서는 현행 법령에서 동성 혼인을 보장하지 않은 것은 위헌이라며, 주무기관은 해석 공고 후 2년 내 관련 법률을 개정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어 행정원은 2018년 국민투표 결과에 의거해 민법 개정 대신 ‘특별법’ 제정을 통해 동성결혼을 법제화할 것임을 선포했고, 2019년 5월 17일 정식으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했습니다. 4년 후인 올해 5월 동성부부의 자녀입양도 허용되었습니다.
타이완 성소수자 권리운동의 선구자 치자웨이(祁家威) - 사진: CNA
동성결혼 합법화와 함께 가정의 구성이 더욱 다양해지고 있는 가운데, 성교육은 급선무가 되었습니다. 아시아 최초 동성결혼 합법화 국가인 타이완은 매우 자유로워 보이지만 2018년 국민투표 중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재에 성교육, 동성애 교육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안건이 부결된 것을 보면, 북유럽 나라처럼 철저한 성교육을 실시하는 것은 아직 갈 길이 멀습니다. 성에 대해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대하면 많은 유감스러운 일을 막을 수 있고, 성 정체성 혼란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면 세상은 더 아름다워 보이겠지요.
엔딩곡으로 타이완 LGBT 프라이드 퍼레이드의 주제곡 ‘무지개(彩虹)’를 띄워드리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가수는 제5회 퍼레이드의 대사인 장후이메이(張惠妹)입니다. 그는 LGBT 운동에 장기적으로 투신해 성소수자 권익을 호소하는 아티스트입니다. 타이완 동성결혼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시면 지난 9월 9일 저와 서승임 아나운서가 함께 진행하는 <신박한 MZ세대 둘>을 청취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랜드마크 원정대>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
1. 「主題說明——與多元同行 Stand with Diversity」,臺灣同志遊行。
2. 「0630參訪側記:與AI Korea等韓國在地團體」,臺灣同志遊行。
3. 「禁『LGBTQ與狗』,台大經濟系學生會選舉政見涉歧視,當事人道歉並停止競選」,關鍵評論網。
4. 王怡蓁,「台灣同志大遊行中,仍未能結婚的『中台』同志與跨性別身影|Whatsnew」,端傳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