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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소리'로 타이완 근대화를 꿈꾼 초대 타이완 학무부장 이사와 슈지(伊沢修二)

  • 2023.05.23
대만주간신보
식민지 타이완 초대 학무부장을 역임한 이사와 슈지(伊沢修二) - 사진: 伊沢修二選集 (1958)

2008년 일본에서 출판된 <국가와 음악: 이사와 슈지가 지향한 일본 근대>라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문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문부성과 도쿄 음악학교를 떠난 이사와 슈지는 1895년에 대만총독부 학무부장으로 임명되어 대만에서 ‘국가교육의 수출’에 매진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이사와 슈지(伊沢修二, 1851-1917)는 메이지 시기 일본의 각종 사범학교와 일본 최초 음악학교에서 교장 및 총장 등 교육가로 활동하다 1895년 타이완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타이완으로 건너가 3년간 타이완 총독부 학무부장을 역임한 인물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오쿠나카 야스토는 이사와 슈지가 일본에서 어떻게 서양음악을 활용해 메이지 초기 일본의 근대화와 국민국가 형성에 이바지 하였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책의 가장 마지막 문단에 그가 타이완으로 가 ‘국가교육', 즉 일본교육을 ‘수출’하는 데 매진했다고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일명 ‘일본 서양음악 교육의 선구자'라 불리는 이사와 슈지는 소리의 근대성과 계몽성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던 인물입니다. ‘근대 청각 문화'라는 분야를 탐색한 캐나다 학자 조너선 스턴은 ‘청취의 과거(The audible past)'라는 책을 통해 전화, 축음기, 라디오와 같은 근대 음향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유럽과 미국의 근대 역사에서 귀와 소리, 청각, 청취 등 ‘청각적 근대성'을 새로운 이슈로 부각시켰죠. 이사와 슈지는 어렸을 적부터 동네 군악대에서 서양식 드럼을 배우기 시작했고, 미국 유학 중에는 피아노와 서양 음계, 서양식 창법을 배우며 근대적 신체를 체득해 갔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체득한 소리와 청취의 중요성을 일본의 사정에 맞게 교육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학교 창가 교육, 시화법, 발음교정 등입니다. 그는 당시 일본 사람들에게도 청각적으로나 지식 차원에서나 낯설 수 밖에 없었던 서양음악과 교육 방식을 메이지 일본의 국가 건설과 근대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수용해 국가교육 제도를 통해 일본에 널리 알렸습니다. 이사와 슈지가 ‘일본 서양음악 교육의 선구자'라 불리는 이유입니다. 

그랬던 이사와 슈지가 1895년 식민지 타이완으로 건너와 초대 학무부장을 맡게 됩니다. 이사와 슈지는 타이완의 일본화를 목적으로 적극적인 일본어 교육 정책을 실시하고자 했습니다. 즉 ‘타이완의 일본화’를 목적으로 적극적으로 국어교육을 실시합니다. 일명 '식민지 동화' 교육의 시작인 것이죠. 식민지 타이완의 초대 학무부장이 된 이사와 슈지는 의견서와 보고서 등을 통해 끊임없이 타이완총독부에 자신의 교육정책 의지를 피력하며, 총독부와의 관계에서 난항을 겪자 일본의 교육단체 언론에도 공개해 여론을 조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실시하고자 했던 일본어 의무교육 정책 초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던 것이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타이완이라는 최초의 식민지를 얻었으나, 초기 식민지 개척 작업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청일전쟁 시기 선포한 ‘타이완민주국’의 항일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해야했고, 총독부의 구체적인 직무나 방안이 전무한 상태였죠. 이런 상태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학무부가 설치되었으나 타이완인 교육에 대한 목표도 모호했고, 타이완인을 대상으로 일본어 교육을 실시할 의지도 없었죠. 이 때 식민지 타이완으로 오기 전 일본에서 각종 사범학교과 음악학교에서의 실무 경험이 풍부했던 이사와 슈지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식민지 타이완의 초대 총독 가바야마 스케노리(樺山資紀, 1837-1922)에게 문화와 교육(文教)을 통해 일본과 타이완 사이에 사상교통의 길을 열고 그들의 풍속을 시찰하면서 타이완인들의 일본을 향한 분노와 적개심을 완화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어를 통해 언어 통일 교육을 실시해 식민지 타이완을 무력으로 정복하는 것이 아닌 문명적인 계몽에 사명이 있음을 인식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1895년 설립된 즈산옌 학무부 학당(芝山巖學務部學堂)은 일본 식민정부의 타이완인 교육을 위한 일종의 실험의 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1월 1일 즈산옌 학당의 6명의 일본인 선생이 신정 축하 차 총독부로 향하는 길에 항일 운동가에게 전원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3개월 간 휴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사와 슈지는 식민지 타이완에 ‘국가교육의 수출'을 목표로 일본어 교육과 공학교 제도 실시 등을 통해 타이완의 일본화 정책에 적극 주장했으나 현실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타이완인은 중국과 달리 북경어가 통하지 않아 언어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을 물론, 일본 관료 내부에서 타이완인과 일본인은 철저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여론도 적지 않았으며, 타이완인들의 항일 저항도 강력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근대 청각 문화'가 가진 강력한 힘을 몸소 체득한 이사와는 ‘일본어’라는 ‘음성’과 ‘소리’를 타이완이라는 미개척 지역에 투여해 근대화 시키고자 하는 이상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즈산옌 사건으로 사망한 6명의 일본인 선생 중의 한 명인 나카지마(中島長吉)는 그가 살해되기 몇 개월 전인 1895년 10월, 잠시 일본에 가 있던 이사와 슈지에게 서한을 보내 타이완에서의 창가(唱歌)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하기도 했죠. 일본어 교육조차 쉽지 않았던 초기 음악을 가르치는 창가 교육은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이사와는 나카지마가 즈산옌 사건으로 사망한 이후 그의 의견을 수용해 적극적으로 창가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총독부 초기 교육법령인 <국어전습소규칙> 에는 “국어전습소는 본도인에게 국어를 교육시켜 일상생활에 도움을 주고, 본국의 정신을 양성하는 것을 그 취지로 한다”는 제1조이 적혀있습니다. 이사와 슈지가 구상한 동화교육이 법제화된 것입니다. 그렇게 일본어와 일본어 가사로 된 창가를 단체로 노래하는 교육이 식민지 타이완에 서서히 제도화되기 시작하면서 일본어 음성과 창가 소리는 식민지 타이완에서 학교를 중심으로 울려 퍼지게 되었습니다.  

초기 식민지 타이완은 타이완인들의 항일운동과 일본 정부의 미흡한 제도 정비로 사회적으로 매우 불안정했습니다. 이 때 3년도 채 안되는 짧은 재임 기간 동안 학무부장을 역임한 이사와가 타이완에서 시도한 전 학교 일본어 교육 정책 구상과 그 실천은 이후 일본의 두 번째 식민지가 된 조선, 즉 한국에서도 이어지면서 제국일본의 전체 시기를 관통하는 식민지 교육 정책의 원점이 되었습니다.   

 

참고문헌

奥中康人, 国家と音楽, 伊澤修二がめざした日本近代, 東京:春秋社, 2008.

劉麟玉, 植民地下の臺灣仁书汁石學校唱歌教育の成立展開, 東京:雄山閣, 2005.

정준영, 식민지 교육정책의 원점: 이자와 슈지의 동화주의와 청각적 근대성, 정신문화연구 34(2), 2011, 153-184.

조너선 스턴, 윤원화 역, 청취의 과거 청각적 근대성의 기원들, 서울: 현실문화, 2010.

 

서승임 徐承任 ([email protected])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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