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코로나 팬데믹 시작 이후 전세계적으로 연극, 음악, 뮤지컬 등 각종 공연들이 중단되어 문화예술계는 그야말로 암담한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죠. 타이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번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전세계적으로 방역 선진국 대열에 오른 타이완은 국내 방역에 그 어떤 나라보다 철저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였던 만큼, 공연계는 잠시 숨을 죽이고 침묵해야했죠. 그로부터 3년 여 넘는 시간이 흘러 2023년 5월 1일을 기점으로 타이완 중앙코로나지휘센터가 해체하고 코비드 19는 통제 가능한 제4군 전염병으로 하향 조정되면서, 타이완도 엔데믹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달 1일부로 타이베이 시내 대중교통과 대형 공연장, 종교 시설 등에서도 마스크를 의무 착용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제법 더운 날씨가 되었지만 그래도 저녁엔 제법 바람이 불어 더위를 식혀주는 5월 중순의 저녁. 타이베이 시내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중정기념당(中正紀念堂) 앞 자유광장에는 코로나가 극성이던 불과 몇 년 전과 달리 사람들이 북적입니다. 퇴근을 하고 아이의 손을 잡고 오는 가족, 삼삼오오 모인 친구들, 할머님 할아버님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중정기념당 앞 자유광장을 지나갑니다. 그리고 자유광장을 지나 타이베이의 유일무이한 대형 음악회장인 국가음악청(國家音樂廳)으로 향합니다. 5월 16일 화요일 저녁 이 날 타이베이 국가음악청(國家音樂廳)에서는 베를린 바로크 솔리스텐(Berliner Barock Solisten)과 타이완의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정위치엔(曾宇謙)이 바로크 시대 주요 음악 레퍼토리를 선보이기 때문입니다.
1987년에 설립된 국가음악청은 주황색 지붕에 빨간 기둥이 눈에 띄는 중국 전통 명청 전당식 건축 양식의 외관과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샹들리에 조명이 비추는 내부 로비의 조화가 인상적인 타이베이의 최대 음악회장입니다. 손전홍 아나운서의 지난 수요산책 프로그램에서 국가음악청에서 열리는 다양한 음악회 소식을 전해드린 바 있었죠. (2022.12.21. '팝페라의 여왕’ 사라 브라이트만부터 조성진까지…타이완의 연말을 화려하게 장식한 공연소식) 국가음악청 안에는 장애인 14석 포함 2022석 규모의 대형홀과 장애인 4석 포함 354석의 소형 연주홀이 있습니다. 1988년 문을 연 서울 예술의 전당의 콘서트홀이 총 2505석이고 최근 몇 년 전 개관한 서울 롯데콘서트홀이 총 2,036석이니 그 규모가 짐작 가시리라 생각됩니다. 5월 16일 베를린 바로크 솔리스텐과 타이완 바이올리니스트 정위치엔이 함께 하는 바로크 음악 공연은 대형홀에서 열렸는데, 3월 9일 티켓팅을 시작하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2천여 석의 좌석은 모두 매진되었죠. 아니나다를까 지난 코로나 팬데믹 기간의 정적과 침묵을 깨고 국가음악청의 대형홀은 2천여명의 청중들로 가득 채워집니다. 마스크를 낀 사람, 끼지 않은 사람, 좌석에 앉아 무대 앞 대형 파이프 오르간과 사진을 찍는 사람, 동행한 일행들과 잡담을 나누는 사람 등, 공연 시작 전 청중들의 설렘과 기대가 넓은 공연장을 한가득 채웁니다. 무대 앞에는 1987년 홀 설립 당시 아시아 최대 규모였던 기계식 파이프 오르간이 인상적입니다. 네덜란트 플렌트롭사(Flentrop)에서 제작한 이 파이프 오르간의 총 높이는 약 3층, 폭은 14미터이며 총 4,172개의 금속과 목관이 조합되어 있어, 그 규모면에서 청중들을 시각적으로 압도합니다.
국가음악청의 대형홀은 3층 규모로 객석 3층과 4층의 측면에는 적게는 4명에서 많게는 10명 정도만 들어갈 수 있는 측면석이 있고, 과거 국가 원수 등 중요 인물만 수용하던 객석 3층 중앙의 VIP석은 지금은 공연 프로그램의 성격에 따라 개방하는데, 이 날은 측면석이나 20석의 VIP석 할 것 없이 모두 만석이었습니다.
음악회의 1부는 베를린 바로크 솔리스텐의 연주로 꾸며졌습니다. 베를린 바로크 솔리스텐은 1995년 베를린 필하모닉 주요 단원들에 의해 창단된 이래 17~18세기 바로크 음악을 꾸준히 연주하며 당시 레퍼토리를 현대적 시각에 맞게 해석하여 연주해내는 데 탁월한 연주단체입니다. 바로크 시대 당대의 악기와 조율방식, 연주방법, 관행 등을 그대로 살려 연주하는 ‘시대연주’를 선보이는 독보적인 단체죠. 이 날 베를린 바로크 솔리스텐은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1번 C 장조 BWV 1066과 파헬벨의 캐논 D 장조,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바이올린과 오보에 협주곡 d 단조 BWV 1060R을 연주해 타이베이 국가음악청을 바로크 시대 유럽의 한 궁정 한복판으로 옮겨놓은 듯한 분위기를 선사했습니다. 만인에게 익숙한 파헬벨의 캐논 D 장조를 바로크 시대 악기 편성 그대로의 소리로 듣는 기분도 색다르게 느껴집니다.
음악회 2부에서는 베를린 바로크 솔리스텐과 타이완 바이올리니스트 정위치엔이 함께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 전곡을 연주했습니다. 지난 3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대극장 등 오스트리아에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 단조 Op. 64 공연을 마치고 5월 타이완에 돌아와 타이베이를 시작으로 가오슝, 신주 등에서 베를린 바로크 솔리스텐과 비발디의 사계를 연주하는 정위치엔은 1994년생으로 올해로 28살인 타이베이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5살에 바이올린을 시작한 정위치엔은 무려 이듬해 타이베이 시립 오케스트라와 연주할 정도로 실력이 상당했다고 합니다. 미국 커티스음악원(Curtis Institute of Music)에서 아이다 카바피안(Ida Kavafian)과 아론 로잔드(Aaron Rosand)를 사사한 정위치엔은 2009년 스페인에서 열린 제 10회 파블로 사라사테 국제 콩쿨, 2011년 대한민국 통영에서 열린 윤이상 국제음악제에서 입상하며 국제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습니다. 2017년에는 타이베이에서 열린 여름 유니버시아드 대회 개막식을 멋진 바이올린 솔로 연주로 장식하기도 했죠. 이날 연륜 있는 백발의 베를린 바로크 솔리스텐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와 생동감 넘치는 젊은 아시안 청년 정위치엔이 함께 호흡을 맞추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무대를 마친 연주자들을 향해 힘찬 박수를 보내는 타이완 청중들의 반응에 힘입어 연주자들은 앵콜곡으로 헨델의 오라토리오 솔로몬 중 첫 곡인 시바 여왕의 도착(Arrival of the Queen of Sheba)을 선보였고, 타이베이 5월의 밤을 장식한 바로크 음악은 헨델의 곡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엔딩곡으로는 이 날 베를린 바로크 솔리스텐과 타이완 바이올리니스트 정위치엔이 함께 연주한 레퍼토리인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E 장조, 작품번호 8번, RV. 269 “봄”의 마지막 악장인 알레그로 파스트롤레(Allegro Pastrole)를 띄워드립니다. 사계 중 봄의 마지막 악장의 소네트(sonett), 짧은 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물의 요정이 나타나 양치기가 부르는 피리소리에 맞춰 해맑은 봄 하늘 아래에서 즐겁게 춤춘다.” 한 해의 시작을 맞는 봄이 저물어가고 뜨거운 태양의 여름을 맞이하기 직전인 5월의 마지막 자락을 이 음악과 함께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5월 16일(화) 타이베이 국가음악청에서 열린 베를린 바로크 솔리스텐(Berliner Barock Solisten)과 타이완 바이올리니스트 정위치엔(曾宇謙)의 음악회 연주 곡목
1 J.S. Bach, Orchestral Suite no. 1 in C major BWV 1066
2 Pachelbel, Canon in D Major
3 J.S. Bach, Concerto for Oboe and Violin in C Minor BWV 1060R
4 Antonio Vivaldi, “The Four Seasons” (Le quattro stagioni)
서승임 徐承任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