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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언론의 자유 쟁취, 정난롱(鄭南榕) “앞으로는 너희들의 일이다”

  • 2023.02.27
포르모사 문학관
타이완 독립 운동가 정난롱(鄭南榕)은 타이완의 민주화를 위해 국민당 정부와 투쟁하다 1989년 분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사진: 안우산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 번이라도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을까요? 반복되는 삶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문학입니다. <포르모사 문학관>에서 타이완 특유의 문학 세계 속으로 함께 들어갑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포르모사 문학관> 시즌2의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내일은 228사건 76주년입니다. 민주화 이전 228사건은 타이완에서 언급조차 징역형을 선고할 정도로 최대 금기였는데,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사건이 벌어진지 40년이 된 1987년 타이완 독립 운동가 정난롱(鄭南榕)이 ‘228 평화의 날 촉진회(228和平日促進會)’를 발족한 시점부터였습니다. 

228사건이 일어난 1947년에 출생한 정난롱은 타이완의 민주화를 위해 국민당 정부와 투쟁하다 1989년 분신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100% 언론의 자유를 쟁취하며 228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해 타이완 이행기 정의 운동에서 선구적 역할과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리고자 하는 타이완 작가는 바로 타이완의 민주와 자유에 헌신하고 《자유시대주간(自由時代週刊)》을 창간한 정난롱입니다.


정난롱(鄭南榕)은 《자유시대주간(自由時代週刊)》잡지사의 편액(匾額)에 '언론의 장유 쟁취, 인권 및 인간의 존엄성 수호'라는 글을 남겼다. -사진: 안우산

가족들을 위해 진로가 비교적으로 다양한 이과를 선택해 타이완 국립성공대학교(成功大學) 공대에 붙었던 정난롱은 1년 후 적성과 맞지 않으므로 재수를 통해 타이완 가톨릭 푸런대학교(輔仁大學) 철학과에 합격했습니다. 2학년 때 타이완 최고 학부인 국립타이완대학교 철학과로 전학하고 철학가 인하이꾸앙(殷海光)을 만나 철학가의 꿈을 품게 되었는데요. 그러나 장기적으로 정부를 비판해온 인하이꾸앙은 숙청을 당해 더 이상 교편을 잡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가 편집한 잡지 《자유중국(自由中國)》도 강제로 폐간되었습니다. 그 후 정난롱은 철학가의 꿈을 포기하며 ‘행동사상가(行動思想家)’를 자칭해 생각을 행동으로 실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타이완독립을 주장하고 중화민국 국부 순원(孫文)을 연구하는 필수과목 ‘국부사상(國父思想)’을 이수하지 않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지속적으로 타이완의 앞길을 고민하고 시국에 관심을 기울였던 정난롱은 1984년에 100% 언론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자유시대주간》을 창간했습니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통제했던 시절에 발행이 중단되지 않도록 총 18개의 잡지 발행 허가증을 신청했는데, 만약 하나가 폐간을 당하면 다른 허가증으로 계속 발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유시대주간》은 타이완 출판계에서 가장 많은 단속 및 폐간 조치를 당하는 잡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잡지사 기자 및 작가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편집장 정난롱은 전적으로 책임을 지겠다는 약조를 했고 심지어 기자가 취재할거나 외근할 때 상한없는 비용을 제공하겠다는 복지제도를 통해 직원들의 존경 및 든든한 믿음을 받았습니다.

계엄령을 발포한지 37년이 지난 1986년에 정난롱은 본격적으로 막후에서 막전으로 나서기 시작했는데요. 그는 계엄령이 발포된 5월 19일에 타이베이 륭산스(龍山寺-용산사)에서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519녹색행동(綠色行動)’을 일으켰고 만약 다음 해 5월 19일까지 계엄령이 해제되지 않을 경우 다시 시위할 거라고 예고했습니다. 이로 인해 정난롱은 재판없이 1986년 6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 수감되었습니다. 정난롱의 부인 예쥐란(葉菊蘭)에 따르면 정난롱은 출소 후 바로 집에 가지 않고 오히려 잡지사에 가서 ‘228사건 40주년이 코앞에 있는데 왜 아직 아무 행동도 없냐’고 질문했으며 ‘228 평화의 날 촉진회’의 설립을 계획하기 시작했습니다. 외성인과 본성인이 결혼한 집안에서 태어나 혼혈아를 자칭한 그는 타이완 전역에서 228사건 기념 시위행렬을 이끌며 228사건의 진상규명을 적극 촉구했습니다.   

1987년 5월 19일, 타이완 계엄령은 여전히 해제되디 않았습니다. 한 달 전인 4월 18일에 정난롱은 연설에서 “나는 정난롱이다. 나는 타이완의 독립을 주장한다”며 타이완 독립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첫 번째 인물이 되어 큰 주목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당시 정부가 곧 계엄을 해제할 거라고 발표했으나 결국 형식만 바꾸고 내용은 바꾸지 않는 국가안전법을 제정했습니다. 그 후 제2회 519녹색행동은 예고했던 대로 벌어졌고 3만여 명 타이완인은 국부기념관(國父紀念館)에서 100% 계엄 해제 및 국가안전법 폐지를 요구했습니다. 1987년 7월 15일, 계엄령이 해제되는 동시에 국가안전법은 발효되었습니다. 따라서 계엄은 해제되더라도 타이완인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고 정난롱의 타이완 독립 주장도 역시 불법이었습니다.

1988년 12월에 정난롱은 《자유시대주간》에 쉬스카이(許世楷)이 작성한 <타이완공화국헌법초안>을 게재해 반란죄로 기소되었습니다. 그는 ‘국민당은 내 시체만 잡을 수 있고, 내 사람은 못 잡을 것이다’며 죽을 때까지 정부와 대항하는 확고한 의지를 표현했고 스스로를 잡지사에서 가두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국민당 정부는 잡지사의 위아래층에서 정난롱의 일거수일투족을 24시간 내내 감시하고 정난롱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자유시대주간》에서 ‘나는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 결심을 내리는 것이 매우 느리고 한 번 결심하면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글을 남겼으며 분신 자살은 그의 마지막 결정이 되었습니다. 당시 그의 가족, 동료, 친구 모두 이러한 극단적 행위를 말렸는데 정난롱은 서가에서 한국 작가 이재오의《한국학생운동사》를  꺼내 읽으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1970년에 분신 자살한 전태일 열사를 많이 존경했죠. 

1989년 4월 7일, 경찰이 잡지사를 둘러싼 후 정난롱은 편집장 사무실의 문을 잠그고 분신 자살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잡지사의 타임 레코더도 그의 죽음과 함께 오전 9시 16분에 멈췄습니다. 5월 19일 정난롱의 운구 행렬이 총통부에 도작하자 타이완 독립운동가 잔이화(詹益樺)는 정난롱의 발자취를 따라 분신 자살했습니다. 정난롱의 대학교 동창은 “정난롱은 죽음을 배우려고 철학을 배운다”고 했는데요. 죽음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 미미한 존재인데 정난롱은 분신했을 때 두려움 없이 팔을 벌리고 ‘나는 타이완 독립을 주장한다'고 외치듯이 죽음을 끌어안았습니다.


정난롱(鄭南榕)이 분신 자살한 후의 사무실, 현재 정난롱 기념관이 되었다. -사진: 안우산

현재 정난롱의 잡지사는 정난롱기념관이 되었고 잡지사가 소재했던 골목도 ‘자유의 골목’이 되었습니다. 정난롱의 희생으로 그의 부인 예쥐란은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하고 교통부 장관, 행정원 부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남편의 정신을 계승했습니다. 예쥐란은 정난롱의 다큐멘터리에서 이렇게 말했는데요. “대학교 때 정난롱은 남이 저를 뺏기지 않기 위해 학교 게시판에서 저희가 사귀는 소식을 발표했어요. 그 사람은 한번 일을 시작하면 바닥을 봐요. 그가 분신 자살하기 전에 제가 그한테 앞으로 우리딸은 어떻냐고 물었는데 그는 앞으로는 너희 들의 일이라고 대답했어요.” 남편의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서 예쥐란은 처음에도 남편을 이해하지 못했죠. 정치에 투신하면서 그는 남편의 의지를 점차 이해하게 되었고 남편 대신 타이완인의 진정한 자유를 쟁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역사 수업 시간에 정난롱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고등학교 동창이 자발적으로 만든 이행기 정의 촉진 동아리를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는데요. 고등학교 때의 역사 교재를 찾아봤더니 정난롱에 대해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아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100% 언론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저희는 정난롱을 결코 잊으면 안 됩니다. 그의 노력과 희생으로 독재정권에서 자유러워질 수 없는 많은 타이완인을 일깨우고 타이완을 지금처럼 자유로운 나라로 만들어줬습니다. 앞으로는 우리의 일입니다.

엔딩곡으로 백색 테러 시대에 금지된 노래 ‘무녀(舞女)’를 띄어드리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정난롱은 손님에게 춤을 추는 무녀로 타이완이 스스로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처지를 비유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모두 자신의 주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포르모사 문학관>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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